[오늘과 내일/박형준]또다시 시작된 ‘슈퍼 엔저’의 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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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하나.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12.3%를 기록했던 1987년, 수출 증가율이 30.3%였던 1995년, 제조업 성장률이 7.3%를 보였던 2011년 등 한국 경제가 잘나갔던 3개 연도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1996년 엔화 약세가 시작되면서 한국 기업들의 수출이 가파르게 줄었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엔저 영향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기업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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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년 후 R&D 강화한 日 충격 대비해야
답은 ‘엔화 강세’다. 1980년대 이후 한국 경제가 호황을 보일 때는 대체로 엔화 강세라는 훈풍이 있었다. 한국과 일본은 산업구조가 비슷해 국제 시장에서 경쟁하는 제품이 많은데, 엔화 강세는 일본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떨어뜨렸다. 한국 수출 기업으로선 성장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엔화 강세가 끝나면 험난한 고생길이 펼쳐졌다. 1996년 엔화 약세가 시작되면서 한국 기업들의 수출이 가파르게 줄었다. 그해 경상수지 적자는 사상 최고 수준인 230억 달러에 이르렀다. 경제가 빠르게 식었고, 기업들의 부채 부담은 커지면서 한보철강과 같은 대기업이 하나둘 쓰러졌다. 당시 엔화 약세는 결국 외환위기를 초래하는 하나의 계기가 됐다.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최근 엔화 약세가 다시 시작됐기 때문이다. 올해 초 100엔의 가치는 940∼1000원 정도였는데, 지난달 900원대 초반으로 급락하더니 이달 초 800원대까지 떨어지는 ‘슈퍼 엔저’ 현상을 보였다. 산업연구원은 원-엔 환율이 5% 하락하면 그해 한국의 수출액은 1.1∼3.0% 감소할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다만 현재 한국 기업의 비명 소리가 그리 크게 들리진 않는다. “과거보다 일본과 경합하는 정도가 줄었다”, “일본에서 수입하는 부품 가격은 오히려 싸졌다” 등 별 영향 없다는 반응도 많다. 대표적인 예가 반도체 기업. 1980년대 반도체 왕국을 이뤘던 일본은 그 후 투자에 소홀했고 지금은 반도체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이 사라졌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D램을 수출할 때 일본 제품과 맞붙지 않으니 엔화 가치에 영향을 받을 이유가 없다.
과거 엔저의 직격탄을 맞았던 자동차 업종도 여유 있는 모습이다. 한일 자동차 기업들이 직접적으로 경합하는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기아는 올해 상반기 전년 대비 17% 증가하는 판매 실적을 올렸지만 같은 기간 도요타는 0.7% 감소했다. 한국차의 상품성과 브랜드 가치가 올라갔고, 전기차 분야에서 한국이 월등히 앞섰기에 나올 수 있는 결과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엔저 영향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기업인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엔저가 초래할 불확실성이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환 위험 대비 능력이 떨어지는 수출 중소기업은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일본에 수출해 엔화로 대금을 받는 중소기업이라면 이익이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철강, 화학, 전자, 부품 등 일본과의 경쟁이 심한 분야는 엔저가 장기화될수록 가격경쟁력에 밀리게 된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달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이 매우 높아 끈기 있게 금융 완화를 지속하겠다”고 말한 것을 볼 때 엔저 현상이 단기간에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예상치 못한 충격이 2, 3년 후에 올 가능성도 있다. 전례를 보면 일본 기업들은 엔저 때 수출 물량을 늘려 시장점유율을 키우기보다 이익을 늘리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쌓인 현금으로 연구개발(R&D)과 제품 혁신에 투자했다. 엔저를 활용해 체질을 강화하는 것이다. 2, 3년 후 그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야말로 한국 기업에 진정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박형준 산업1부장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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