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여전히 히딩크가 그리운 이유

유석재 기자 2023. 7. 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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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1년 전 ‘人事의 원칙’을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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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6월 5일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구장에서 열린 2022 FIFA 한일월드컵 20주년 기념 '2002 월드컵 레전드 올스타전'에서 히딩크 전 감독이 관중들에게 엄지를 치켜 세우고 있다. /뉴스1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이 4강에 오른 지 20년 넘게 지났는데도 거스 히딩크 감독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최근 콜린 벨 한국 여자축구팀 감독도 ‘거스 히딩크를 참조해 선수들이 위계질서에 짓눌리지 않도록 노력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히딩크 감독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 중 가장 커다란 것은 한국팀의 4강 진출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바로 ‘원칙의 소중함’이었습니다. 그는 선수의 지명도와 위계질서를 배제하고 철저한 실력과 잠재력의 검증을 통해서 발탁했으며, 온갖 친연(親緣)관계를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단순명쾌하면서도 지당(至當)한 영역의 담론입니다. 히딩크를 거꾸로 뒤집어보면 그때까지 우리 축구계의 대표선수 발탁은 온갖 비(非)스포츠적인 요소의 언저리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대중적인 인기와 온갖 연고(緣故)의 작용 말입니다.

어찌 축구뿐이겠습니까. 우리 사회 전체가 다 ‘말로만 히딩크’를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 ‘독특하다’ ‘유별나다’라는 평가를 받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사회의 모든 구악(舊惡)의 요소들을 죄다 ‘유교(儒敎)적 폐습’으로 돌리는 목소리들은 “아직도 우리 사회엔 케케묵은 유교적 관념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히딩크의 원칙은 그대로 맹자(孟子)의 원칙과 통합니다. ‘맹자’ ‘양혜왕(粱惠王) 하(下)에서의 맹자의 목소리는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曰: 國君進賢, 如不得已, 將使卑踰尊, 疏踰戚, 可不愼與?

(왈: 국군진현, 여부득이, 장사비유존, 소유척, 가불신여?)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의 군주는 현인(賢人)을 등용하되 부득이한 것과 같이 해야 합니다. 장차 지위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뛰어넘을 수 있게끔 하며,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람이 혈연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을 뛰어넘도록 하는 것이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부득이한 것처럼 해야 한다. 부득이한 것처럼… 즉, “아, 정말 심사숙고해 본 결과 도저히 어쩔 수가 없어서 이 사람을 뽑았다”라는 고뇌의 모습을 내 비쳐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고통스런 고려의 시간들이 충분히 거쳐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피터 드러커는 “인사문제에 관한 결정을 신속하게 처리했다가는 자칫 잘못될 결정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주자(朱子)는 맹자의 이 ‘부득이하다’라는 말을 ‘삼가기를 지극히 하는 것(근지지야·謹之至也)’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즉흥적인 인사나 정치적인 인사, 지역 안배나 정당 배려나 특정 계층 배려와 같은 요소가 들어가야 한다는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논어(論語)’에선 공자가 위(衛) 영공(靈公)의 무도함을 힐난하자 계강자(季康子)는 “그런데 왜 위나라가 아직도 망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중숙어가 외교를 맡고, 축타가 종묘를 다스리고, 왕손가가 군사를 맡아 다스리니 어찌 망하리오!” 여기에 대해서 주자는 이렇게 해설박스를 붙입니다. “중숙어·축타·왕손가 세 사람은 모두 위나라 신하로 반드시 어질지는 못했지만(수미필현·雖未必賢) 그 재능이 쓸만했고(이기재가용·而其才可用), 영공이 이들을 등용함에 각각 그 재능에 맞게 했다.”

유가의 이상적인 인물, 군자(君子)와 통하는 개념인 현인(賢人). 덕과 재능을 겸비한 인물인 현인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재능만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무도한 임금이 그나마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한 것만으로도 나라를 보전할 수는 있다. 하물며 도(道)가 있는 임금이 천하의 현재(賢才)를 등용함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도대체 도(道)가 없는 임금이나 권력이 현인은커녕 재주도 없는 인물을 등용할 경우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축구가 이랬다면, 붉은악마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그 후로 길거리를 활보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비존유(卑踰尊) 소유척(疏踰戚)이란 여섯 글자는 매우 극적입니다.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를 뛰어넘고, 혈연관계가 없는 자가 친척을 뛰어넘는 것. 맹자는 마치 이것이야말로 ‘인사의 대원칙’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당연히 현(賢)과 재(才) 두 가지일 터. 계속 이어지는 맹자의 다음 말은 매우 리드미컬하면서도 냉정하리만치 단호합니다.

左右皆曰'賢', 未可也; 諸大夫皆曰'賢', 未可也; 國人皆曰'賢', 然後察之, 見賢焉然後, 用之. 左右皆曰'不可', 勿聽; 諸大夫皆曰'不可', 勿聽; 國人皆曰'不可', 然後察之, 見不可焉然後, 去之.

(좌우개왈’현’, 미가야; 제대부개왈’현’, 미가야; 국인개왈’현’, 연후찰지, 견현언연후, 용지. 좌우개왈’불가’, 물청; 제대부개왈’불가’, 물청; 국인개왈’불가’, 연후찰지, 견불가언연후, 거지.)

좌우의 신하가 모두 ‘어질다’고 말해도 아직 안되며, 여러 대부들이 모두 ‘어질다’고 말해도 아직 안되며, 국인(國人)이 모두 ‘어질다’고 말한 뒤에 살펴봐서 어짊이 보이거든 그 후에 등용해야 한다. 좌우의 신하가 모두 ‘안된다’고 말해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들이 모두 ‘안된다’고 말해도 듣지 말며, 국인이 모두 ‘안된다’고 말한 뒤에 살펴봐서 안되는 점이 보이거든 버려야 한다.

마지막 문장의 ‘거지(去之)’ 두 글자는 싸늘하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국인(國人)이란 단순히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도시에 사는 중산층’의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즉 여론주도층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21세기에 몇 개 정권을 거치며 보아온 인사란 이런 것은 아니었던가요.

“좌우의 신하 중 내 말을 잘 알아듣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측근 몇 명이 ‘어질다’ 또는 ‘정국을 타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면 재빨리 귀담아 듣고 경력과 학력을 훑어본 뒤 즉각 등용하며, 그 후에 국인이 모두 ‘안된다’고 말해도 듣지 말고, 여러 대부들이 모두 ‘안된다’고 말해도 듣지 말고, 마침내 좌우의 신하들마저 모두 ‘상당히 곤란할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면 그 후에 비로소 살펴봐서 ‘아무래도 영 안될것 같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이나마 들거든 그때서야 이모저모 따져보고 신하들을 질책한 뒤 사람을 갈거나 정치적 타협안을 마련한다. 그런 식으로 버티다 임기를 마치거나 마치지 못하고 실패한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히딩크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여러 부분에서 히딩크의 원칙을 필요로 한다는 얘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것은 오래 전 맹자와 같은 원시유가의 가르침과도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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