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의 자기 억제 없이는 내분 안 끝나… 플라톤의 권고[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30인 참주’의 공포정치
플라톤이 16세이던 기원전 411년, 과두파에 의해 민주정이 전복되었다. 민주정이 수립된 지 100년 뒤의 일이다. 민주정은 100년 전통의 관성 덕분에(마치 혼자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복원되었지만, 몇 달 동안 아테나이 사람들은 처형, 암살, 테러의 극심한 공포를 겪었다. 민주정이 강압적인 다수결에 의해 ‘민주적으로’ 폐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더 큰 트라우마를 남긴 것은 아테나이 패전 직후의 내분과 혼란이었다.
기원전 404년, 27년 전쟁에서 아테나이가 항복한 뒤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30인 참주’라고 불리는 ‘집단 독재 체제’였다. 과도정부의 목적은 민주정을 대체할 새로운 국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재자들은 법을 아예 무시하고 평의회와 정부 요직을 차지한 뒤 무법 정치를 펼쳤다. 반대자 체포와 처형, 원한이나 돈 문제로 인한 시민 살해, 재산 몰수 등이 일상이었다. 물론 ‘30인 참주’ 가운데 중도정치를 지향하는 온건파가 없지 않았지만, 이들은 “보이는 적보다 더 위험한 배신자”로 낙인찍혀 제거되었다. 과격파의 우두머리 크리티아스는 불법과 폭력에 대한 온건파의 우려를 일축했다. “정치체제가 변화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 같은 일이 일어난다.” 민주정에 비판적이었던 플라톤조차 이런 뻔뻔함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 지켜보니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정치체제를 황금으로 보이게 해 주었습니다.”(‘편지’)
공포정치의 수명은 짧다. 30인의 공포정치도 여덟 달을 넘기지 못했다. 그들의 무법과 폭력에 스파르타마저 등을 돌리자, 망명했던 민주파가 돌아와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일부 반대자들에 대한 보복이 따랐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민주파는 “대체로 온건하게 처신했다”. 하지만 이 정권 역시 플라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번에는 소크라테스의 처형이었다. 귀환한 망명자들 중 하나가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것으로 보아 그의 재판과 처형의 배후에는 정치적 동기가 있었던 것 같다. 크리티아스는 한때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철인왕 정치’ 꿈꿨던 플라톤
공동의 만족 위한 준법 필요
노년의 플라톤은 젊은 시절의 생각을 바꾼 것 같다. 내분에 말려든 시라쿠사이의 지인들이 정치적 조언을 구하자 일흔이 넘은 철학자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사람들을 추방하고 살해함으로써 보복을 하거나 적들에 대한 복수에 매달리기를 그만두고, 자신을 억제하면서 자기 자신들이나 패한 자들이나 똑같이 만족할 만한 공동의 법들을 세워, 경외심과 공포라는 두 가지 강제력을 써서 그들이 그 법들을 지키도록 강제하기 전에는, 내분에 처한 사람들에게 패악이 그치는 일은 없습니다.”
남부 이탈리아의 시라쿠사이는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였다. 플라톤은 평생 세 번 그곳을 방문해서 철인왕의 꿈을 실현하려 했지만 그의 노력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정치적 이상은 현실 정치에 부딪혀 물거품이 되었다. ‘편지’에 담긴 조언은 그런 실패자가 전하는 아주 평범한 지혜였다. 플라톤이 거창한 철인왕정의 계획을 포기하고 상식의 지혜로 돌아간 것은 그런 실패의 경험 탓일까, 나이 탓일까? 아니면 그의 시대가 내분에 휩싸였듯 그의 정치의식도 이상과 현실로 분열되어 있었을까? 어쨌든 ‘편지’에서 플라톤이 남긴 내분에 대한 처방은 ‘국가’의 거창한 철학보다 더 현실적이다.
고대 그리스의 내분, 조선의 당쟁, 대한민국 정치의 정쟁은 양상도, 결과도 다르다. 하지만 그 모든 형태의 ‘대립’은 항해하는 배의 안전을 위협하는 선상(船上) 대결이라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권력 투쟁에서 이긴 자들의 자기 억제와 공동의 만족을 위한 준법 없이는 내분이 끝나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권고는 내분의 시대를 산 철학자의 소박하지만 무거운 경고이다. 권력자들에게 자기 억제를 강제할 방법을 찾는 것이 또 다른 과제로 남지만….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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