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자의 자기 억제 없이는 내분 안 끝나… 플라톤의 권고[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2023. 7. 27.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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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가 1787년 그린 ‘소크라테스의 죽음’. 아테나이의 과두파 크리티아스의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는 공포정치를 폈던 과두파가 실각하고 민주파가 재집권한 뒤 민주파 인사의 고소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사진 출처 브리태니커 홈페이지
《‘내분’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stasis’이다. 이 말은 본래 ‘서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온 말로 ‘섬’, ‘입장’을 뜻한다. 하지만 ‘섬(立)’은 곧 다른 편에 ‘맞섬(對立)’을 뜻하기 때문에, stasis는 반대 세력에 맞서는 상황, 즉 ‘내분’ 상황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서 내분과 전쟁의 악순환을 자세히 기록했지만, 대처 방법은 내놓지 않았다. 내분에 대한 처방 찾기에 고민한 사람은 한 세대 뒤의 철학자 플라톤이다. 그런데 ‘국가’와 ‘편지’에서 그가 제시한 처방은 서로 다르다.》



‘30인 참주’의 공포정치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펠로폰네소스전쟁 속 내분은 케르퀴라 같은 주변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축국 아테나이에서도 전쟁 중 내분과 정치 격변이 잇달았다. 그 양상은 언제, 어디서나 똑같았다. 민주파와 과두파의 대결이 이 시기 내분의 본질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4년 뒤에 태어난 플라톤은 분열의 시대 한복판으로 내던져진 셈이었다.

플라톤이 16세이던 기원전 411년, 과두파에 의해 민주정이 전복되었다. 민주정이 수립된 지 100년 뒤의 일이다. 민주정은 100년 전통의 관성 덕분에(마치 혼자 일어서는 오뚝이처럼) 복원되었지만, 몇 달 동안 아테나이 사람들은 처형, 암살, 테러의 극심한 공포를 겪었다. 민주정이 강압적인 다수결에 의해 ‘민주적으로’ 폐지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하지만 플라톤에게 더 큰 트라우마를 남긴 것은 아테나이 패전 직후의 내분과 혼란이었다.

기원전 404년, 27년 전쟁에서 아테나이가 항복한 뒤 스파르타의 지원을 받는 과도정부가 들어섰다. ‘30인 참주’라고 불리는 ‘집단 독재 체제’였다. 과도정부의 목적은 민주정을 대체할 새로운 국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재자들은 법을 아예 무시하고 평의회와 정부 요직을 차지한 뒤 무법 정치를 펼쳤다. 반대자 체포와 처형, 원한이나 돈 문제로 인한 시민 살해, 재산 몰수 등이 일상이었다. 물론 ‘30인 참주’ 가운데 중도정치를 지향하는 온건파가 없지 않았지만, 이들은 “보이는 적보다 더 위험한 배신자”로 낙인찍혀 제거되었다. 과격파의 우두머리 크리티아스는 불법과 폭력에 대한 온건파의 우려를 일축했다. “정치체제가 변화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그 같은 일이 일어난다.” 민주정에 비판적이었던 플라톤조차 이런 뻔뻔함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 지켜보니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의 정치체제를 황금으로 보이게 해 주었습니다.”(‘편지’)

공포정치의 수명은 짧다. 30인의 공포정치도 여덟 달을 넘기지 못했다. 그들의 무법과 폭력에 스파르타마저 등을 돌리자, 망명했던 민주파가 돌아와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일부 반대자들에 대한 보복이 따랐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민주파는 “대체로 온건하게 처신했다”. 하지만 이 정권 역시 플라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번에는 소크라테스의 처형이었다. 귀환한 망명자들 중 하나가 소크라테스를 고소한 것으로 보아 그의 재판과 처형의 배후에는 정치적 동기가 있었던 것 같다. 크리티아스는 한때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다.

‘철인왕 정치’ 꿈꿨던 플라톤

그리스 아테네 아카데미 건물 앞에 있는 플라톤 동상. 조대호 교수 제공
이런 내분과 혼란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50세 중반까지 플라톤은 한 가지 생각에 몰두했다. 권력과 철학을 하나로 만드는 것, 즉 ‘철인왕’을 세우는 것이었다. 항해 중 혼란에 빠진 배를 상상해 보자. 선주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세지만 항해술에 무지하다. 눈과 귀가 어둡다. 선원들은 선주를 농락하며 배의 지휘권을 놓고 다툼을 벌인다. 선주를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서로 죽인다. 배 밖으로 내던진다. 별자리, 바람, 물길을 아는 키잡이가 있지만 혼란 속에서 그는 무용지물로 조롱당한다. 그가 배를 안전하게 이끌 유일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 눈과 귀가 먼 선주(대중)도, 권력욕에 날뛰는 선원들(정치꾼들)도 아닌 항해를 ‘아는’ 키잡이(철학자)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안전한 항해를 보장하니까. 플라톤의 ‘철인왕 이론’은 ‘아는 자의 정치를 위한 변론’이었다.
아테나이 시민들이 모여 민회를 열었던 프닉스 언덕의 현재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치는 간단하다. 세종이나 정조 같은 성군의 정치가 이어진다면, 그것이 바로 ‘철인왕의 정치’에 가깝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선거에 돈 쓸 일도 없고 정치 때문에 핏대를 세울 일도 없이 우리는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은 천년왕국의 꿈일 뿐이다. 성군의 정치가 대를 잇지 못한 현실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이다. 조선은 성리학 이념에 따라 왕을 철학자로 만들기 위해 경연(經筵)을 베풀고 왕권을 견제할 수많은 장치를 마련했으나 헛일이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구상한 철인왕의 제도와 교육 방안은 더 엄격하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철인왕이 과두정으로, 과두정이 민주정으로, 혼란 속 민주정이 참주의 독재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달리 어떻게 내분을 막을 수 있을까?

공동의 만족 위한 준법 필요

노년의 플라톤은 젊은 시절의 생각을 바꾼 것 같다. 내분에 말려든 시라쿠사이의 지인들이 정치적 조언을 구하자 일흔이 넘은 철학자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 사람들을 추방하고 살해함으로써 보복을 하거나 적들에 대한 복수에 매달리기를 그만두고, 자신을 억제하면서 자기 자신들이나 패한 자들이나 똑같이 만족할 만한 공동의 법들을 세워, 경외심과 공포라는 두 가지 강제력을 써서 그들이 그 법들을 지키도록 강제하기 전에는, 내분에 처한 사람들에게 패악이 그치는 일은 없습니다.”

남부 이탈리아의 시라쿠사이는 그리스인들의 식민도시였다. 플라톤은 평생 세 번 그곳을 방문해서 철인왕의 꿈을 실현하려 했지만 그의 노력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정치적 이상은 현실 정치에 부딪혀 물거품이 되었다. ‘편지’에 담긴 조언은 그런 실패자가 전하는 아주 평범한 지혜였다. 플라톤이 거창한 철인왕정의 계획을 포기하고 상식의 지혜로 돌아간 것은 그런 실패의 경험 탓일까, 나이 탓일까? 아니면 그의 시대가 내분에 휩싸였듯 그의 정치의식도 이상과 현실로 분열되어 있었을까? 어쨌든 ‘편지’에서 플라톤이 남긴 내분에 대한 처방은 ‘국가’의 거창한 철학보다 더 현실적이다.

고대 그리스의 내분, 조선의 당쟁, 대한민국 정치의 정쟁은 양상도, 결과도 다르다. 하지만 그 모든 형태의 ‘대립’은 항해하는 배의 안전을 위협하는 선상(船上) 대결이라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권력 투쟁에서 이긴 자들의 자기 억제와 공동의 만족을 위한 준법 없이는 내분이 끝나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권고는 내분의 시대를 산 철학자의 소박하지만 무거운 경고이다. 권력자들에게 자기 억제를 강제할 방법을 찾는 것이 또 다른 과제로 남지만….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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