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의 ‘무한 소통’ 약속…‘말의 품격’ 앗아가는 악마의 유혹이었나[전문가의 세계 - 박주용의 퓨처라마]

기자 2023. 7. 2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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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사람의 말처럼 생긴 어떤 것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어린 시절에는 주로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의 <파운데이션>이라든가 더글러스 애덤스(1952~2001)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라는 영문 제목의 줄임말은 HHGG로 불린다) 같은 SF를 즐겨 읽었지만, 요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Много ли человеку земли нужно)?’라는 러시아 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단편소설이 기억나는 일이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내 땅을 가질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빠홈이라는 소작농이다. 욕망에 젖어있던 빠홈에게 어느날 사탄이 약속을 한다.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지는 사이에 네가 걸어서 만든 경계로 둘러싸인 땅을 너에게 주겠다”라고. 빠홈은 최대한 넓은 땅을 갖고 싶은 욕심에 해가 뜨자 출발점으로부터 최대한 멀리멀리 걷는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비로소 감당하기 힘들 만큼 멀리 와버린 것을 알아챈 빠홈은 급한 마음에 죽을힘을 다해 출발점으로 달려오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기력이 다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끝끝내 자신이 꿈꾸던 큰 땅덩어리를 갖게 되는가 했지만 그 대가는 자신의 목숨이었고, 소설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자기 몸뚱이 하나 묻힐 단 한 평’이라는 답을 암시하며 끝난다.

이 소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나는 이 이야기가 말하려는 바가 진정 무엇인지 한참 동안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독자분들은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누군가는 ‘과욕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한없는 인간의 욕망에 대비되는 현실의 허망함을 그렸다’라고 할 것이다. 근데 또 누군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삶을 제대로 영위하기 위한 냉철한 과학적 전략의 필요성을 알려준다’고 할지도 모른다. 즉 빠홈은 욕심에 눈이 멀어서 멀리멀리 걸어가며 땅을 키우려고만 했을 뿐, 주어진 시간 안에 자신이 움직일 수 있는 거리를 미리 예측해 놓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가령 12시간 동안 해가 떠있다고 가정하고 평균적으로 시간당 3㎞를 움직일 수도 있다고 하면(성인의 평균적인 도보속력은 시간당 5㎞이지만 도중에 쉬고 밥도 먹어야 할 것이므로) 총 36㎞를 움직일 수 있다. 이 추정치를 바탕으로 빠홈이 미리 수학자에게 물어봤다면 36㎞로 둘러쌀 수 있는 최대의 면적은 반지름이 36/(2×원주율) = 5.6㎞인 원으로서 대략 97㎢의 땅을 노릴 수 있다는 답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빠홈이 현대의 농경제학자에게 물어봤다면 원은 농사짓기가 쉽지 않으니 정방형으로 하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고, 이는 곧 81㎢의 땅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또 그 동네 지리에 통달한 사람에게 물어봤다면 정방형이 아니더라도 샘이 포함되도록 하는 게 더 현명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수 있다(필자처럼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1986년에 나온 프랑스 영화 <마농의 샘>을 보면 땅에서 물이 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뭐 그렇게까지 과학을 끌어와서 읽느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톨스토이 스스로가 크림전쟁(1853~1856)에서 기하학을 잘 알아야 하는 포병 장교로 복무하면서 상도 받았다는 것을 상기해본다면 꼭 허무맹랑한 독서법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가 필요한가?

온라인 24시간 ‘자유로운 발언’
소통에 대한 욕망 해소해준 SNS
등장 이후 ‘공론장’ 역할 큰 기대

자 이제는 도대체 왜 오늘 필자가 이 질문을 하였는지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벌써 4분의 1이 지나가고 있는 21세기의 생활상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사건은 인터넷을 등에 업은 페이스북(2004년)이나 트위터(2006년) 같은 SNS의 등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퓨처라마’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듯이, 물질(먹을 것)에 대한 욕망을 해소해준 것을 ‘1차 산업혁명’으로, ‘소통에 대한 욕망’을 해소해준 이것을 ‘2차 산업혁명’으로 불러주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 정도이다.

그 정도의 거창한 이름을 얻을 자격이 있든 없든 간에, 이렇게 온라인으로 24시간 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해댈 수 있는 새로운 시대는 많은 것을 약속하는 듯했다. 특히나 조지 오웰(1903~1950)의 디스토피아(반이상향·反理想鄕) 미래소설인 <1984>에서 등장한 표현인 ‘빅브러더’로 불리기도 하는, 우리들 위에 군림하면서 검열을 자행하고 침묵을 강요하는 거대한 권력으로부터 인간이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멋진 신세계가 드디어 열린다며 설렜던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2022년 한 해에만 약 2000억편의 트윗이 날려졌다고 하니, 어림잡아 트위터 탄생 이후 날린 트윗의 총 숫자가 무려 1조는 넘었을 것이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큰 숫자의 ‘자유로운 발언’이 이루어진 지금, 과연 SNS의 약속은 얼마나, 아니 SNS에 우리가 걸었던 기대는 얼마나 현실이 되어 있을까?

현실은 아무런 필터 작동 안 되며
사람의 말이라 할 수 없는 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가기만 하는 곳

그 질문에 대해 네트워크 과학자로서, 또 한때 이른바 ‘전산 사회학(computational social science)’을 했던 사람으로서 주고 싶은 답은,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이었던 퍼거슨경이 한 말, “시간 낭비이다”와 일맥상통한다. 아니, 저렇게 심오한 질문에 그렇게 무성의한 짧은 답을 주다니라고 생각한다면, 다음처럼 길게 대답해드릴 수도 있다. “SNS는, 숙의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와 열린 사회를 위한 새로운 대화의 장이 될 것이라는 처음의 기대는 온데간데없이, 머리와 입(여기에서는 손가락) 사이에 아무런 필터가 작동하지 않게 됨으로써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글자의 탈을 쓴 채 산더미처럼 쌓여가기만 하는 곳”이라는. 이런 데서 자기 말을 돋보이게 하려고 하니 표현만 더 격해지면서 같은 내용을 반복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또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을 찾으려고 하니 결국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과만 어울리는 사람들. 그리고 한순간의 인기와 언급수를 위해 신념을 어기는 사람들까지. 이것이 진정한 소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선구자’라던 머스크·저커버그도
‘옥타곤 맞짱’ 따위 말싸움 벌이며
생각과 말의 품격 ‘추락’만 보여줘

그래서 SNS의 이러한 본질을 아는 사람들은 테슬라, 스페이스X의 창립자인 일론 머스크가 갑자기 트위터를 인수하려 한다는 소식을 거짓이라고 믿었다. 인류의 미래를 개척해가던 사람이 왜 시간 낭비와 불통의 장에 뛰어들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뉴욕타임스의 논설가 브렛 스티븐스는 “머스크가 트위터를 인수한 다음에 인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헌은 트위터를 없애버리는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머스크가 테슬라 지분까지 팔아가며 인수한 트위터의 가치가 몇 동강이 나버리고 복제품까지 나와버린 지금 트위터의 파랑새 로고를 ‘X’로 바꾸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최소한 트위터라는 이름은 없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절반의 위안을 받고 있다.

쉰 둘의 머스크에게 닥친 이 상황은, 역사에 남을 정도로 심각한 중년의 위기라고 생각된다. 반을 훌쩍 넘긴 인생을 돌아보며 한 번쯤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신나는 일탈을 해야 할 시기에, 재산을 털어서 구입한 파랑새가 불타 추락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페이스북 주인이라면 다를까? 멀쩡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거추장스러운 기기를 쓰고 앉아서 다리 없는 아바타로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는’ 메타버스가 더 즐거운 삶이라고 주장하다가, 이제와서는 남들과 접촉이 많은 주짓수를 통해 마음을 다스린다고 하는 마크 저커버그 말이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옥타곤에서 주먹으로 맞짱뜨자며 맞붙은 머스크와 저커버그. 거대 SNS의 주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말로 주먹다짐하면서 남들의 시간을 뺏는 것을 보면서 회사들이 주인을 닮아가는 것인지, 주인들이 회사를 닮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거대한 ‘2차 산업혁명’의 총아로서 ‘미래 문명을 이끌 선구자’라는 사람들조차도, 생각과 말의 품격을 앗아가는 SNS의 흑마법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품격이 있는 말, 의미 없는 말

평생 ‘기인’ 딱지 붙었던 잡스는
진심 담은 말로 자신의 꿈 펼치며
본질에서 벗어나는 말 한 적 없어

이렇게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관심이 필요한가?’를 고민하는데, 필자의 유튜브 피드에 1999년 마흔 다섯 살을 맞은 스티브 잡스의 인터뷰 음성이 떴다. 아직 집집마다 고속 인터넷이라는 게 많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질문들도 지금의 관점에서는 아주 원초적이다. 예를 들어, ‘고속 인터넷 시대가 오면 소프트웨어도 가게에 가지 않고 집에서 내려받을 수 있게 될 것인가’ 같은. 하지만 잡스는 모든 질문에 대해 진지하지만 신나는 말투로 자기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을 그려냈고, 인터뷰 도중 어느 한순간도 대화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개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사실 잡스는 퍼스널 컴퓨팅의 선구자로서 사람들에게 풍운아로 인식될 만큼의 인생역정을 겪었기에 그의 사생활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하지만 애플이 만든 초기 베스트셀러인 ‘애플 투 플러스’(Apple ][+ 라고 표시한다) 시절부터 함께한 필자의 기억에도 그가 컴퓨터가 아닌 자신에 대한 인터뷰를 한 적은 거의 없었다. 호사가들에게 개인사에 대한 먹잇감을 던져주지 않는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기인, 괴짜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일절 반응하는 일이 없었다. 본인의 뜻에 따라 사후에나 발간된 잡스 전기를 읽어보면 유일한 기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번호판 없이 벤츠 AMG 스포츠카를 타고 출퇴근했다는 점이다. 사실 그가 잡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번호판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도 없었겠지만.

‘진정한 사람의 말’ 구별하는 질문
‘무엇이 사람의 말을 만드는가’

이 시점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돌아와볼까. 우주에 올라갔다 와서는 “이건 바로 여러분의 돈으로 다녀온 것”이라는 말로, 아마존에서 분유와 연필을 구입해온 알뜰한 우리 보통 사람들을 잊지 않아준 친절한(?) 제프 베이조스, 빈말의 무덤인 트위터에 전재산을 털어넣고 나서는 저커버그에게 주먹싸움이나 하자며 더 많은 빈말을 만들어내는 머스크, 또 그 빈말을 받는 척하면서 바로 며칠 뒤에 트위터 복제품을 내놓은 저커버그, 그리고 잡스와 숙명의 라이벌로서 퍼스널 컴퓨팅의 시대를 함께 연 뒤 인류를 위한 자선 사업가로 나섰지만 많은 추문으로 흔들리고 있는 빌 게이츠.

그런데 막상 세상은 이들과 달리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을 담고 자신의 꿈을 그려내는 데만 힘썼던 잡스를 평생 기인으로 묘사해왔다. 우리는 “진정한 사람의 말”과, “사람의 말처럼 생기기만 했지 무의미한 문자와 소리의 조합”을 구별해낼 능력이 그다지 시원찮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기에서 묻고 다음번에 대답해보려 한다.

‘무엇이 사람의 말을 만드는가?’

박주용 교수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앤아버)에서 통계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트워크와 복잡계 물리학에 기반한 융합 데이터 과학 전문가로서 노트르담대학교, 하버드 의과대학 데이너-파버 암연구소 연구원을 거쳐 현재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에서 문화예술과 과학의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며, AI 이후 시대를 준비하는 카이스트 포스트AI 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에 빠져 대학팀 랭킹 알고리즘을 고안한 뒤 지금도 빠져 있으며, 시간이 생긴다면 자전거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싶어 한다.

박주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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