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두 거인, 모두 매우 가까이해야 할 나라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중국 인민에 대한 한국인의 시각이 공격적이며 차별적이고 배타적이어서 중국 인민이 설령 한국에 호감을 갖고 다가가려 해도 이 요소가 방해가 된다. 그러므로 한국이 심리 자본(배타적 자긍심 등)을 개선해나간다면 중국 인민들의 마음을 열 수 있을 것이며 궁극적으로 중국의 상황에 큰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 (…) 이것이 한국이 싸우지 않고 이기며 공존공영하는 방법이다.
―이철, <중국의 선택>, ‘중국을 바꾸면 북한도 바뀐다’
국제적 편가르기가 점입가경이다. 위태로워 보이지만 당연한 현상이다. 과거 강대국들의 일방적 힘쓰기, 줄세우기는 가능하지 않다. 지난 100년, 인류 역사 전체의 발전이 미처 따라잡지 못할 만큼 세계는 급진을 이뤘다. 나라가 저마다 성장하고 개인이 깨쳤다. 편가르기는 어느 나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국제질서의 재편 과정이다.
중남미는 복지를 향상하고, 최저임금을 높이며 노조를 강화했다. 미국 재무부와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다른 정책으로 국민소득을 늘리며 자신들만의 경제 성적표를 쓰고 있다. 미국의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덩샤오핑 이후 개혁개방을 추구했던 중국의 고민도 크다. 급속한 경제발전과 부의 축적은 내부 갈등을 키웠다. 불공정한 세상에 대한 불만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시진핑의 ‘중국식 사회주의’ 강화와 일대일로는 내부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이다.
어느 나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시대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인이 대립하지만, 우리에게는 두 나라 모두 매우 가까이해야 할 나라다. 오늘 우리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됐다. 민주주의와 방역, 탄소중립을 위해 세계와 함께 행동하며 국민의 성숙한 모습에 세계가 경탄한다. 우리 역량을 스스로 과소평가하며 수동적으로 끌려갈 이유가 없다. 혈맹으로서 가치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웃으로서 함께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가 결정하고, 우리가 설득하고, 우리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다.
2021년 6월, 최초로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대한민국이 초청됐다. 우리의 국격, 국제적 역할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정상회의를 마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남긴 회한이 가슴 깊게 남아 있다.
G7 정상회의에 참석하면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마음속에 맴돌았습니다. 하나는 1907년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입니다. 일본의 외교 침탈을 알리기 위해 시베리아횡단철도를 타고 헤이그에 도착한 이준 열사는, 그러나 회의장에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한반도 분단이 결정된 포츠담회의입니다. 우리는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강대국들 간의 결정으로 우리 운명이 좌우되었습니다.
―문재인, ‘콘월, G7 정상회의를 마치고’, 2021년 6월14일
한 세기 만에 우리는 다른 나라와 지지와 협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지속가능한 세계를 위해 우리 목소리도 낼 수 있게 됐고, 많은 나라가 우리나라와 협력하기를 원한다. 국민이 이룬 성취다. 성숙한 국민이 있는 한, 또다시 강대국들의 이익에 쫓겨 파국을 맞이하는 상황은 오지 않을 것이다.
정쟁에 묻힌 진심
지금 우리 국민의 반중 의식이 81%에 이른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과 고구려의 역사를 뺏으려는 동북공정, 북한의 핵도발이 맞물려 오랜 교류에 금을 내고 말았다. 무엇보다 중국 관계에 좀더 힘을 실어야 할 때다. 김치, 한복까지 자신들 것이라고 우기니 우리 국민이 중국을 미워하는 건 당분간 바꿔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정부까지 이에 편승하는 것은 하책 중 하책이다.
<중국의 선택>은 엔지니어이며 사업가로 중국을 경험한 저자의 통찰이 담겼다. 저자는 중국 산시성의 사업가 친구에게 ‘첫인상’이 무슨 개념인지 설명해주고 첫인상을 결정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물었다.(한국인의 경우 30초 이내, 미국인의 경우 3분 이내라고 한다.) 대답은 이러했다. “음, 첫인상이 그런 뜻이라면 나 같은 경우 첫인상이 정해지기까지 1년 정도 걸리는구먼.”(‘우리와 남을 나누는 중국인’)
중국을 잘 아는 것 같지만, 우리는 여전히 중국을 모른다. 아니 중국 역사와 정치는 알지만, 중국 인민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이 중국 인민의 마음을 여는 것이며 그렇게 중국을 바꿀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비록 그것이 바람일지라도 우리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는, 한 공학도의 마음이 상책이라 여긴다.
2017년 12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다. 난징대학살 80주년, 한-중 수교 25년이 되는 해였고 사드 보복 이후 한-중 관계 복원을 위한 방문이었다. 당시 문 대통령은 베이징대학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도 정쟁에 묻혀 그 강연 내용이 우리 내부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아쉽다. 그것은 아무리 큰 나라도 협력 없이 발전할 수 없다는 일침이었고, “대국답게 행동하라”는 일갈이었다.
“중국이 더 많은 다양성 포용할 때 꿈 실현 믿는다”
중국은 단지 중국이 아니라 주변국들과 어울려 있을 때 그 존재가 빛나는 국가입니다. 높은 산봉우리가 주변의 많은 산봉우리와 어울리면서 더 높아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중국몽이 중국만의 꿈이 아니라 아시아 모두, 나아가 전 인류와 함께 꾸는 꿈이 되길 바랍니다. (…) 나는 중국이 더 많은 다양성을 포용하고 개방과 관용의 중국정신을 펼쳐갈 때 이 꿈이 실현 가능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문재인, ‘베이징대학 연설’, 2017년 12월15일
연설이나 강연은 구체적인 청중을 대상으로 한다. 가령 사관학교 졸업식 같은 경우 신임장교로 그 대상이 명확하다. 그렇지만 그 연설을 듣는 것은 그들뿐이 아니다. 넓게는 국민 모두를 향한 안보와 국방 연설이기도 하다. 외교무대에서는 조금 복잡해져서 그 나라의 국민과 우리 국민을 동시에 청자로서 염두에 두지만, 좀더 세분하면 그 나라의 정부와 국민을 구분하기도 한다.
베이징대학 강연에서 문 대통령은 중국공산당에서 출당당한 천두슈를 거론하고, 장제스가 “중국 군인 백만 명이 못해낸 일을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칭송한 윤봉길 의사를 떠올렸다. 시진핑의 민주법치를 통한 의법치국에 공감하면서도 사회주의 발전이 아니라 인민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의미로 “나도 <삼국지연의>를 좋아합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내용은 유비가 백성들을 이끌고 신야에서 강릉으로 피란을 가는 장면입니다. 적에게 쫓기는 급박한 상황에서 하루 10리밖에 전진하지 못하면서도 백성들에게 의리를 지키는 유비의 모습은 ‘사람이 먼저’라는 나의 정치철학과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지금 자신이 도달한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한다. 여전히 주종 관계에 머물러 있는 이들에게는 문장 곳곳 중국에 예를 다하는 소국의 대통령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중국과 가까워질수록 혈맹과의 관계가 걱정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성숙이 주는 자존감, 주도해보겠다는 자신감을 가진 이들이라면 문장마다 존중과 겸손을 읽고, 이를 통해 중국 인민을 한편으로 만들어 실익을 얻으려는 실용적인 태도를 봤을 것이다.
실학자 박제가의 기록에서 얻어야 할 교훈
지금 중국은 드론, 가상현실, 인공지능 같은 4차 산업혁명 분야의 중심지다. “페이스북, 구글, 야후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의 이른바 ‘아이티(IT) 만리장성’에 막혀 있는 동안, 로컬 IT 기업들은 자국 정부의 보호막 아래 거대 공룡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명견만리: 윤리, 기술, 중국, 교육 편>, ‘중국은 어떻게 주링허우 세대를 키우는가’)
강연의 마지막에 문 대통령은 “나는 지난여름 휴가 기간 중 <명견만리>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라며 중국의 3.0 시대를 이끌어가는 중국 젊은이들을 소개했다.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의 전통 위에 4차 산업혁명 분야에서 미래를 찾는 우리 젊은이들의 중국을 향한 협력의 길을 막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배울 것이 있으면 배우고, 가르칠 것이 있으면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새로운 세계질서다. 뒷줄에 설 이유가 없다. 18세기 실학자 박제가의 답답함이 오늘에 이르지 않길 윤석열 정부에 바란다.
내가 북경에서 돌아왔을 때 ,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중국의 풍속에 대해 듣고 싶어 했다 . “( … ) 말과 글이 일치하며 집은 금색으로 채색되었다 . 도읍과 성곽 , 악기의 화려한 음색 , 무지개 모양의 다리와 푸른 숲 , 사람들이 활기차게 거니는 풍경 등은 완연히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 그들은 모두 황당해하며 내 말을 믿지 않았다 . 그러고는 실망한 채 돌아갔다 . 아마 내가 너무 오랑캐를 편든다고 생각한 것 같다 . 아아 , 이들은 모두 앞으로 이 나라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백성을 다스릴 사람들이 아닌가 . 그런데 이렇게 답답하니 , 오늘날 우리나라의 풍속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
― 박제가, <북학의>, ‘북학에 대한 변론 1’
신동호 시인·전 대통령 연설비서관
*대통령의 독서: 지도자는 진지한 삶과 독서로 탄생합니다. 그의 말과 글에는 마치 수면 아래 빙산처럼 오랜 시간 다져진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비서관이었던 신동호 시인이 역대 대통령들의 독서가 어떻게 말과 글에 반영됐는지 좇아가는 글을 연재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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