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은 점술에 빠질까?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

2023. 7. 2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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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과 점성술에 매료된 카트린 드 메디시스
1560년경 프랑수아 클루에 작업실에서 제작된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초상화(왼쪽)와 1614년경 노스트라다무스의 아들 세자르 드 노스트르담이 그린 노스트라다무스의 초상(오른쪽).

16세기 프랑스에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에 속하는 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프랑스 왕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와 오늘날까지 그 명성이 사라지지 않은 신비주의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다. 카트린은 앙리 2세의 왕비이자 그의 뒤를 이은 세 왕의 어머니, 그리고 섭정을 통해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의사이자 점술가였다. 혁신적인 치료법을 주장하며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고 많은 인명을 구한 의사였으나, 나중엔 유럽 전역을 정처 없이 떠돌며 명상과 오컬트(occult)에 빠졌고,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예측하는 능력을 얻었다고 한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그녀의 아이들. 1561년 프랑수아 클루에 작업장. 캔버스에 유채. 198cm × 137.2cm 스트로베리 힐 하우스, 영국 런던.

위 그림은 1590년, 궁정 화가 프랑수아 클루에(François Clouet)의 작업장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카트린과 그녀의 아이들을 그린 단체 초상화다. 카트린이 아들 프랑수아 2세를 막 잃은 직후였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제 겨우 열 살의 나이로 프랑스 왕에 즉위한 또 다른 아들 샤를 9세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은 그의 어깨에 얹고 있다. 이 자세는 매우 인상적이고 상징적이다. 카트린이 새로운 군주를 백성에게 소개하는 동시에 그녀가 섭정으로서 그를 보좌하고 지도하며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것임을 보여준다. 샤를 9세 옆에는 ‘여왕 마고’로 알려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 미래의 앙리 3세, 그리고 맨 왼쪽엔 막내아들 앙주 공작이 있다. 그들은 서로 닮은 모습으로 가족 구성원 간 끈끈한 유대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버지 없이 남겨진 어린 자식들을 보호하고 왕조를 지켜야 하는 어머니이자 여왕인 한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에서 보다시피 남편의 죽음에 대한 애도 기간이 끝난 후에도 카트린은 계속 검은색 옷을 입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그녀가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한 헌신적인 여성이었다’고 평가한다. 과연 그럴까? 당시 사회는 여성에게 통치자의 지위를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권력을 가질 만한 정당성을 스스로 입증해야 했다. 그녀의 상복은 자신이 깊은 가톨릭 신앙을 가진 경건한 사람이자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부덕(婦德)을 갖춘 아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하에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다. 그녀는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아는 기민한 정치인이었다.

이런 영리한 처세의 배경엔 평생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사랑이 결핍되고, 정치적으로는 치열한 정쟁의 한가운데서 싸워야 했던 고단한 삶이 있었다. 그녀는 명문 메디치가에서 태어났지만, 출생 직후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고모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프랑스의 앙리 2세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그의 정부 디안 드 푸아티에한테 푹 빠져 있었다. 프랑스 궁정에서 비천한 상인 집안 출신의 외국인으로 무시당하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빨리 왕자를 낳아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것이었다. 결국 결혼 10년 만에 아들을 얻었고, 그녀의 아들 세 명이 모두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

앙리 2세가 죽고 카트린이 어린 아들들의 섭정이 되었을 당시, 프랑스는 신교와 가톨릭 간의 종교전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녀는 어린 자식들을 지키고 왕권을 확립하는 한편, 사회적 불안과 폭력 속에서 질서와 안정을 되찾으려고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연이은 아들들의 죽음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계속되는 시련의 인생에서 점술이 그녀를 안심시키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덜어주었을 것이다.

카트린은 원래 연금술과 점성술, 신비주의에 관심이 많았고, 이탈리아인 흑마술사를 가까이 두기도 했다. 또한 노스트라다무스의 열렬한 후원자이자 추종자였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앙리 2세의 죽음을 정확히 예언했고, 이로 인해 카트린은 그를 매우 신임하게 되었다. 그를 궁정 고문 및 주치의로 임명하기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카트린의 요청으로 왕자들의 별점을 쳐주었고 여왕을 위한 부적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그녀가 정적을 죽이려고 독약과 흑마술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카트린은 점술을 통해 신의 영역을 엿보고 운명에 대비하고 복을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편과 자식들의 이른 죽음도 막지 못했고 자신에게 닥친 그 어떤 불행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정말 미래를 예측했을까?

카트린이 그토록 신뢰한 노스트라다무스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의 전형적 이미지는 수염을 기른 중세 신비주의자가 어두운 다락방에 앉아 깃펜을 손에 들고 물그릇을 들여다보는 모습이다. 그는 밤에 서재에서 특별한 허브를 섞은 물 한 그릇에 시선을 집중한 채 명상하면서 몇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물은 노스트라다무스를 무아경에 빠뜨렸다. 이 순간, 그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어 미래를 내다보았다고 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55년, 예언서(Les Prophéties)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그는 거의 1,000가지에 달하는 예언을 기록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주로 지진, 기근, 질병, 전쟁과 같은 재난에 대해 말했다. 그는 그리스어, 라틴어, 중세 프랑스어를 포함한 다양한 언어를 사용해, 4행시(quatrain) 형식으로 글을 썼다. 그의 시는 항상 모호하게 은유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겼다. 연도와 날짜도 명시하지 않았다. 그의 예언이 수 세기에 걸쳐 여러 극적인 사건에 임의로 적용되어 해석될 수 있었던 이유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런던 대화재,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JFK 암살, 심지어 COVID 전염병에 이르기까지 16세기 이후 거의 모든 주요 역사적 사건을 예견했다고 전해진다. 1999년엔 그가 예언했다는 지구멸망설로 한동안 세상이 떠들썩했다. 2023년 지구에 일어날 대재앙들을 예언했다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 내용은 대략 큰 전쟁, 홍수, 가뭄과 같은 천재지변, 식량난, 사회적 불안 등이다. 호사가들은 노스트라다무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예견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기후 위기와 천재지변 같은 현재 상황에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기도 하지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미래를 예측하는 신통력을 가진 사람들과 그 추종자들은 늘 존재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예언자와 점술가에게 의존했던 것이다. 첨단과학의 시대라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이 역술인, 무속인, 관상가, 풍수지리가를 찾아간다. 그들은 정말 앞일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혹세무민하는 사기꾼들일까?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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