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민의 그.래.도] 지렁이와 홍준표 대구시장
[김소민의 그.래.도]
김소민 | 자유기고가
‘신성한 의식’은 일주일에 한번 열린다. 내가 다니는 회사엔 ‘지렁이 모임’이 있다. 집사 5명이 모였다. 수박껍질을 잘게 썬다. 무게를 잰다. 물기를 빼기 전엔 617g, 다 짜내면 345g이다. 어른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토분 뚜껑을 연다. 선풍기 커버에 포크로 구멍을 뚫어 뚜껑을 만드니 습도가 딱 맞았다. 흙을 살짝 긁어내니 지렁이들이 꼬물꼬물 나온다. 살아 있는 짜장면 같다.
지렁이 모임은 한 직원의 면접시험장에서 탄생했다. “포부가 뭔가요?” “지렁이를 키우고 싶어요.” 반대 의견도 있었다. 이 직원은 평온한 얼굴로 “조언 감사하다”며 그냥 지렁이를 들여왔다. 장바구니를 안 들고 마트에 오면 팔에 물건 탑을 쌓는 이 친구는 “지렁이가 음식물쓰레기를 처리한다는 얘기를 듣고 키워보고 싶었다”고 했다. 2021년 5월8일 지렁이 500g이 택배로 회사에 왔다. 첫 식사는 버섯. 그다음 식사는 달걀껍데기, 양배추, 사과, 참외껍질이었다. 꼼꼼히 기록해뒀다.
지렁이들이 자꾸 죽었다. 2021년 10월13일엔 4명이 모여 진지하게 논의한 뒤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1. 통풍이 잘되는 베란다 바깥으로 지렁이 집을 옮기자 2. 급여량을 줄이자 3. 달걀껍데기를 모으자(지렁이가 좋아함). 문제는 습도였다. 습기를 올려준 뒤엔 지렁이 태평성대가 열렸다. 2022년 12월31일 ‘지렁이 모임’ 연말정산을 보면, 1년간 지렁이들은 무려 음식쓰레기 10.133㎏을 처리했다.
지렁이는 구도자다. 채소를 좋아하고 육류는 싫어한다. 마늘, 생강 같은 자극적인 음식, 오렌지껍질, 레몬, 튀긴 음식은 금물이다. 지렁이는 눈, 코, 귀, 팔다리, 이빨이 없다. 삶의 핵심만 남긴 극강의 미니멀리스트다. 누굴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고, 차별하려야 차별할 수 없다.
390만년 전 출현한 인간은 지구를 죽이지만 4억년은 살아온 지렁이는 고요히 지구를 살린다. 낙엽 같은 지표면 유기물을 흙 속으로 가져와 흙과 함께 먹고 식물이 좋아하는 분변토를 눈다. 토양을 수직, 수평으로 끊임없이 쟁기질해 영양과 공기를 순환시킨다. 식물이 뿌리내리기 쉽도록 땅속에 숨구멍을 뚫는다. 죽어서는 식물의 영양분인 질소원이 된다. 주검은 미생물의 활동을 돕는다. 찰스 다윈은 책 ‘지렁이의 활동에 의한 옥토의 형성’에 이렇게 썼다. “쟁기가 발명되기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지구 위의 흙은 지렁이가 경운해왔으며, 인류 역사상 지렁이와 같이 이렇게 중요한 기능을 가진 동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 과학자 앙드레 부아쟁은 지렁이가 인류문명의 발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흙속의 보물 지렁이’, 최훈근 지음, 들녘) 다윈에 따르면 지렁이는 한해 동안 1㏊(약 3천평)에 분변토 38톤(프랑스 초지)을 만든다. 인간의 유적들은 지렁이가 만든 땅에 파묻혔다.
나는 지렁이교에 입교하고 싶다. 지렁이의 생식은 평등하고 정말이지 화끈하다. 암수한몸인데 서로가 필요하다. 짝짓기한다. 지렁이 몸에 볼록한 띠인 환대를 난포막이 감싸고 있다. 암생식기에서 나온 난자가 여기 담긴다. 머리에 더 가까운 곳에 수정낭이 있다. 짝짓기할 땐 두 몸이 점액성 액체로 뒤덮여 한몸이 된다. 서로의 수정낭에 자신의 정자를 방출한다. 무려 서너시간 동안! 이후 환대가 수정낭 쪽으로 슬슬 올라와 난자와 정자가 결합한다. 환대는 지렁이 몸 위를 움직이는 일종의 지하철, 난자를 먼저 그다음에 정자를 태운다. 지렁이가 이 환대를 스웨터처럼 벗으면 거기서 알이 태어난다. 짝짓기한 둘은 출산 동료다. 지렁이 세상엔 성차별도 동성애 혐오도 없다. 그들은 다만 사랑하며 지구를 구한다. 신은 지렁이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직도 인간이 지렁이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하나? 홍준표 대구시장은 시청 공무원들을 데리고 대구퀴어축제를 막으러 갔다가 적법한 절차에 따른 집회를 보호하려는 경찰과 충돌했다. 2015년부터 서울광장에서 열리던 서울퀴어축제도 올해는 장소를 을지로로 옮겼다. 서울시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가 사용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의록엔 혐오 발언이 빼곡하다. 홍준표 시장은 “성소수자의 권익도 중요하지만 성다수자의 권익도 못지않게 중요하다”며 혐오 발언을 꾸준히 해왔다. 나는 홍 시장 등이 성다수자의 권익을 누리기 소망한다. 더운데 남의 사랑 방해하는 데 기력을 쓰지 말고 성다수자로서 성적 기쁨을 누리는 데 쓰기를 간절히 바란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 사랑하는 데만도 바쁘다. 선미가 노래하지 않았나. “24시간이 모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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