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DT인] 韓美日 아우른 로봇·AI 세계석학… "연구자에 R&D 목표 요구 말아야"
美NSF 6년·日지역소장 경력의 과학기술 국제협력 정통 전문가
평가대신 창의·도전적인 연구환경 만들어줘야 질좋은 성과 나와
여준구 한국로봇융합연구원 원장
"100% 성공하는 정부R&D 사업이 문제라고 하는데, R&D 선진국인 미국에선 정부 연구과제에 대해 성공·실패를 평가하지 않아요. NSF(미 국립과학재단) 지원을 받는 연구자들은 연구제안서에 정량적 목표를 제시하지도 않죠. 구체적인 성과 달성을 조건으로 달지 않고 연구비를 주는 '그랜트(grant)'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로봇분야의 세계적인 석학 여준구(65·사진) 한국로봇융합연구원 원장은 "우리 정부R&D 과제가 100% 성공 판정을 받는 것은 애초에 제도가 그렇게 설계돼 있기 때문"이라며 "연구자에게 사전에 목표를 써내라고 하는데 100%가 안 되면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미국 정부의 R&D 과제를 선정하고 평가·관리하는 백악관 직속 NSF에서 6년간 근무하고, 그중 4년은 로봇·컴퓨터비전 분야 국가 연구예산관리 책임자인 PD(프로그램 디렉터)를 지낸 여 원장은 미국 R&D 지원제도에 대해 국내 누구보다 해박한 인사다.
미 NSF는 성공·실패 대신 연구의 성실·부실 여부를 철저하게 본다. 연구를 부실하게 한 연구자는 다음 연구제안서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이와 달리 국내에서는 연구제안서에 목표를 쓰도록 요구한다. 최근 국내에서는 R&D 성공률 100%가 정부R&D의 비효율과 낮은 생산성을 대표하는 수치가 됐다. 나아가 연구비 나눠먹기, R&D 카르텔 의심까지 받고 있다.
여 원장은 "R&D는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를 변화시키는 만큼 정량적 목표 수치, 논문, 특허 개수, 사업화 성과 등 단기적 결과만으로 평가하고 효율성을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면서 자율주행차 기술을 예로 들었다. 자율주행 기술은 미 국방부 연구조직인 DARPA(국방고등기획국)가 약 20년전 개최한 무인자동차 경주대회가 시초가 됐다. 당시 여러 로봇 자율주행 연구팀이 대회에 참가해 모하비사막을 차량 스스로 횡단하는 경쟁을 펼쳤다. 그 결과들이 이어져 현재 자율주행 기술로 열매를 맺고 있다.
여 원장의 전문분야는 수중에서 스스로 움직이는 자율수중로봇이다. 어릴 때부터 뭔가를 뜯어보고 고치고 만드는 걸 좋아했던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납땜을 익혔다. 라디오 조립 세트를 사서 납땜을 해서 라디오를 만들고 고장 난 TV를 해체해서 직접 고치기도 했다. 카세트테이프가 나오기 전에 녹음 테이프로 쓰였던 커다란 릴테이프 장비를 방에 설치해 홈 스테레오를 만들어 음악을 듣기도 했다. 공직에 있던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커서 과학자가 되라고 했다.
서울대 기계설계학과를 졸업한 후 미 오리건주립대에서 로봇 전공으로 기계공학 석·박사를 받은 여 원장은 하와이주립대 기계공학과·정보전산학과 교수를 겸직하며 1980년대부터 자율수중로봇을 연구했다. 1991년 미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등 로봇, 특히 자율수중로봇 분야 세계적인 석학 반열에 올랐다. 세계최고 기술학회인 IEEE의 석좌회원이기도 하다.
약 18년간 교수로 재직하던 그는 2001년부터 6년간 미 NSF에서 로봇·컴퓨터비전 분야 연구과제를 기획하고 선정·평가·관리를 총괄했다. 2011년부터 2022년까지 진행된 미 범부처 연구지원 프로그램 '내셔널 로보틱스 이니셔티브'의 밑그림 작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2006년 한국에 돌아와서는 한국항공대 5·6대 총장을 역임했다. 이후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로봇·미디어연구소 초대 소장을 거쳐 2019년부터 로봇융합연구원을 이끌고 있다. NSF 재직 당시 일본 도쿄 소재 NSF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사무소장으로 2년 근무했으니, 한·미·일을 아우르고 기계와 로봇·AI(인공지능)를 꿰뚫으면서 과학기술 국제협력에도 정통한 전문가다.
로봇융합연구원은 국내 정부기관, 기업 등과 손잡고 산업·사회현장에 쓰이는 로봇 개발과 실용화를 이끌고 있다. 해저 작업을 사람 대신 하는 수중로봇을 개발해 전남 욕지도 부속섬 상수관 해저 매설, 베트남 해저 가스관 매설 공사 등에 적용했다. 가스관, 상수관, 정유·화학공장 등에 많이 쓰이는 배관을 검사하고 보수하는 인파이프로봇도 개발했다. 극지에서 과학탐사 안전성을 확보해 주는 극지로봇도 개발하고 있다. 농기계 기업 대동과는 공동 연구센터를 설립해 농기계 로봇을 개발한다. 방역로봇, 광물 리사이클링을 위한 전기차폐배터리 자동해체 로봇도 주요 연구분야다.
로봇은 최근 AI의 부상으로 함께 조명받고 있다. 이미 식당, 병원부터 산업현장 곳곳에 파고들어 생활과 산업을 바꿔놓고 있다.
여 원장은 "80년대 박사과정을 밟을 때도 로봇이 미래라고 했는데, 90년대 교수로 있을 때도, 세기가 바뀐 지금도 여전히 미래먹거리라고 한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미래가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수술로봇, 청소로봇, 서빙·배달로봇, 자율주행차를 예로 들었다.
최근에는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고 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산업현장에 로봇을 도입하는 사례가 빠르게 늘고 있다. 수백대 협동로봇은 산업현장을 완전히 바꿔놓기도 한다.
여 원장은 "농업부터 제조현장까지 DX(디지털혁신) 바람이 불고 있는데, DX가 제대로 되려면 데이터를 수집하고 AI를 적용해 디지털화된 시스템으로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그런데 작업을 사람이 하면 데이터를 사람 손으로 일일이 입력해야 한다. 그와 달리 로봇을 쓰면 데이터가 자동으로 만들어진다. 가장 첨단화될 DX의 툴이 바로 로봇"이라고 했다.
로봇이 기술적으로 넘어야 할 세가지 과제로 인간과 로봇의 상호작용, 로봇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정교하게 손작업을 하는 AMM(자율이동 로봇팔), 수많은 로봇이 공동 작업을 하는 멀티로봇 시스템을 꼽은 여 원장은 AMM은 10년내, 나머지 두가지는 좀 더 시간이 걸려야 할 것으로 전망했다. "인간·로봇 상호작용은 AI 기술의 발달로 풀릴 수 있을 것"이라는 여 원장은 "멀티로봇시스템, 즉 군집로봇은 자율주행차가 도로에서 실제로 달리면서 차끼리 소통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혁신이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R&D 혁신이 이슈가 되면서 해외 연구시스템을 잘 아는 여 원장은 정부와 관련 기관에 목소리를 내는 일에도 열심이다. NSF나 NIH(미 국립보건원) 같은 미국 R&D 지원기관이 연구결과를 평가하지 않는 것은 안정적인 연구환경을 만들어주고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연구에 뛰어들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면 더 질좋은 성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물론 대규모 국책 연구사업이나 확실한 미션이 있는 국방부의 R&D 지원·평가방식은 다르다.
우리나라는 국가연구개발혁신법 등을 통해 연구환경이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다. 처음 선정 당시 결정된 연구비를 해가 바뀌면 깎도록 요구하는 것도 관행이다. 연구과제나 연구기관장을 뽑을 때 당사자에게 목표를 내라고 하고는 마지막까지 그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R&D 생태계의 경직성으로 이어진다. 기술이 급속도로 바뀌는 시대에 이런 경직성은 기술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여 원장은 "연구기관 평가도 기관장 임기를 시작할 때 낸 목표를 가지고 하고, 중간에 목표 수정은 매우 어려운데, 3년간 환경이나 기술이 아무리 바뀌어도 처음 세운 목표대로 가야 하니 시대에 뒤떨어질 우려가 있다"고 했다.
수십년전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잘 사는 나라를 쫓아가기 급급했던 시대에 만든 제도가 세계 1등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시기에 우리 연구현장을 옭아매고 있는 셈이다. 대규모 연구비가 들어가는 국가 사업을 대상으로 하는 예비타당성 조사제도를 R&D 사업에 적용하는 것도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일하다. 여 원장은 "예타제도는 교량이나 고속도로 같은 건설사업에는 적합할 수 있다. 연구과제가 성공할 지도 모르는데 경제성을 미리 계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부 예산 낭비를 예방하는 것이 취지라면, 그에 맞게 R&D에 적합한 예타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정부 R&D 예산의 반 이상을 쓰는 대학과 정부출연연구기관이 투자를 잘 해서 ROI(투자대비효과)를 높이려면 연구를 지원하는 관련 부처와 한국연구재단 같은 기관이 철저히 관련 전문가를 통해 수월성 중심으로 연구과제를 선정하는 게 답"이라는 여 원장은 "기초연구는 신진·중견 등 연구자 경력별 지원보다 바이오·로봇 등 학문별 지원 중심으로 개편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서는 학문분야별 정부 R&D 과제 선정과 연구비 집행을 총괄하는 PD에 미국처럼 절대적인 힘이 실려야 한다는 게 여 원장의 의견이다. 미 NSF의 PD는 전문가 평가패널을 두고 연구과제를 심사하지만 과제선정, 연구비 집행 등에서 최종 결정 권한을 갖는다. 성공 확률이 낮은 고위험 연구는 PD가 자체 예산 주머니를 두고 직접 선정하기도 한다. 물론 전체 과정은 기록을 남기고 선정결과 검토위원회 등의 검증을 받는다. 우리나라도 연구재단에 유사한 방식을 도입했지만 차이가 많다.
여 원장은 "NSF에선 PD에 학문별 묶음예산을 주고 예산을 좌지우지하도록 권한을 준다. 그러나 결국 PD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학문 커뮤니티의 집단지성이 작동하는 구조"라면서 "우리나라도 유사 제도는 다 있는데 들여다 보면 그 제도가 아니다.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런 시스템이 돌아가려면 과학기술 행정조직에 행정 전문가와 별도로 기술 전문가들이 포진해서 전혀 다른 역할을 하도록 트랙이 구분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전문성이 없이 순환 보직하는 공무원이나 비상근 전문가로 구성된 부처나 산하조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
최근 정부가 신경쓰는 R&D 국제협력과 관련해선 "아직 과학기술 선진국에 비해 절대적인 예산 차이가 큰 만큼 국제협력을 확대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단, 특수한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외국기관 소속 외국인에게 국가 연구과제 책임자를 맡기는 나라는 없다"면서 "참여연구, 위탁연구 등의 방법으로 풀고 한미양자기술센터처럼 전략적으로 국가 차원에서 협력 프로그램을 추진하거나 현지 랩 설치 지원을 활성화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효율적이다. 자칫 국민 세금 낭비로 이어질 수 있고 기술안보 이슈, IP(지식재산권) 소유권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경애기자 naturean@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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