色의 구도자, 9개 가구·1134가지 색에 시대의 욕망을 담다
1.5㎝ 간격의 촘촘한 줄무늬 회화
옷장 등과 함께 배치…거실 온 듯 연출
이번 전시 위해 19년 만에 아파트 연구
"층고 높아진 만큼 더 거대해진 욕망 표현"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색이 존재할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과학자 뉴턴과 수많은 화가까지…. 인류 역사 속에는 색에 대한 끝없는 정의와 연구가 존재했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의 욕망과 지식의 크기가 커질수록, 사회가 복잡해지고 상품이 많아질수록 색을 정의하는 이름도 비례한다. ‘티파니 블루’ ‘코카콜라 레드’ ‘맥도날드 옐로’처럼 컬러의 이름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20년 넘게 ‘세상의 모든 색’을 탐구하고 수집해온 작가가 있다. 2000년대 초 개성 넘치는 신세대 작가로 주목받았던 박미나 작가(50·사진)다.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건 2003년의 ‘오렌지 페인팅’. 당시 부동산 과열로 미술 시장 붐이 일자 한 갤러리스트가 “컬렉터가 오렌지 페인팅을 의뢰해왔다”고 한 게 시작이었다. 그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오렌지 물감을 수집하고 캔버스의 가로 길이를 그 물감의 수로 나눴다. 각각의 색을 2~3㎝ 두께로 칠해 당시 유행하던 2인용 소파 크기에 맞게 완성했다. 스트라이프 페인팅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19년. 박 작가는 27일부터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아홉 개의 색, 아홉 개의 가구’로 오렌지 페인팅을 확장하고 재해석한 작업을 선보인다. 9개의 회화 작업에 쓰인 색상만 1134개. 서울 청담동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만난 박 작가는 “‘평화로운 흰색’ ‘모네 라일락’ ‘복숭아 한 꼬집’ 등의 색상명을 읽다 보면 이름이 보여주는 사회의 단면과 미술사와의 관계, 문학적 감수성이 더해져 마치 시를 읽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고급 아파트도, 색도 욕망의 결과들
검정 벽에 놓인 아홉 개의 가구 다이어그램. 그리고 그 위엔 가구의 색과 어울리는 스트라이프 회화들이 걸렸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그리고 무채색인 흰색 회색 검정. 박 작가의 회화는 단순한 회화로만 볼 수 없다. 회화의 기본 요소인 색채와 형상을 누구보다 집중적으로 탐구해온 ‘색의 구도자’이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그는 색채 수집, 색칠 공부 드로잉, 딩뱃 회화처럼 새로운 개념의 회화 연작을 했고, 그 기반엔 면밀한 연구 조사 활동이 있었다. 그에겐 ‘걸어 다니는 팔레트’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정도다. 해외 주요 페인트업체의 새로 나온 색상 이름들과 그 질감, 그들의 인수합병(M&A) 소식까지 꿰뚫고 있다.
박 작가의 물감 수집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붙어있는 오랜 버릇이다. 회화용 물감은 물론 가정용 페인트, 색연필, 볼펜, 화장품까지 다양한 안료를 모두 수집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가 수집한 색은 1134개. 어느 것 하나 혼합하지 않고 단일 재료로 썼다. 그는 ‘조수가 없는 화가’로도 유명하다. 얇은 선을 수없이 그어야 하는 고된 작업에도 ‘그리기의 과정에 개인차가 개입되는 것을 피해야 한다’며 홀로 노동한다. 2004년 이후 19년 만에 ‘럭셔리 아파트 연구’를 한 작가는 최근 몇 가지 달라진 점을 파악했다.
“2010년 이후 SNS가 활성화하면서 자신의 집 인테리어 디자인을 자랑하는 게 현대인의 진정한 ‘플렉스’(과시용 소비 패턴)가 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삶과 거리가 멀지만 그 정보들이 실시간 공유되면서 또 다른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이죠. 값비싼 아파트들을 다니며 평균 천장고가 30㎝가량 높아졌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가상의 집을 짓고, 1000개의 색을 긋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아진 덕에 작가가 수집할 수 있는 물감의 수는 두 배로 늘었다. 더 다채로워진 물감을 적용하기 위해 줄무늬의 넓이는 과거 2~3㎝에서 1.5㎝로 줄었다. 전시장은 마치 누군가의 아파트 거실에 들어온 것처럼 꾸며졌다. 그의 작업 중 옷장과 매칭된 옐로 작품은 세로 길이 304㎝로 가장 길다.
옷장에는 옐로 물감 234개, 소파엔 그린 물감 234개, 침대에는 블루 물감 202개, TV장엔 레드 물감 154개, 라운지 의자엔 보라색 물감 81개 등이 쓰였다. 이 숫자만 보면 “진짜 다 다른 색이 여기 쓰였다고?”라는 질문이 나온다. 작가는 캔버스에 칠해진 물감을 순서대로 빠짐없이 기록한 ‘물감 리스트’를 하나의 증거자료처럼 배치했다. 수집한 물감의 제조사와 색의 명칭 등 ‘색의 출처’를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다.
안소연 아뜰리에 에르메스 아티스틱 디렉터는 “인공 물감은 원래 자연을 최대한 재현해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유통하는 산업 시스템이 구축한 정보를 우리 모두가 수동적으로 학습하고 소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작가의 수집 목록에는 미국 건축자재 판매 기업인 홈디포가 판매하는 DIY 페인트 목록도 있다. 파란색에는 ‘행복의 추구’ ‘선원의 꿈’ ‘부적’이, 자주색에는 ‘엘리트’ ‘영원함’ ‘장엄함’ ‘그럴듯함’ 등의 추상적인 단어들이 명명돼 있다. 이 전시는 19년의 시간이 흘러 우리 시대의 욕망이 얼마나 더 거대해져 있는지, 색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주관적일 수 있으며 얼마나 많은 시대의 문화와 취향을 반영하는지 곱씹게 한다. 전시는 10월 8일까지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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