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도 나그네의 나이에 맞춘다
세 번째 방문이지만 마을 숲길을 걸어 본 것은 처음이다. 최근 쇠소깍에 왔을 때 걷고 싶었지만 동행이 있어 아쉬웠다. 하례리와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그때는 마을은 생각하지 못했고 효돈천을 걸었다. 그때 효돈천 트래킹을 기획했던 친구들은 지금 제주생태관광은 물론 우리나라 생태관광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이번 숲길은 그때와 달랐다. 숲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하천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그때보다 숲과 하천의 환경은 더 나빠졌을 것이다. 그런데 심연으로 다가오는 숲은 더 깊고 울림이 크다. 내 마음이 숲과 하천과 바다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었다는 것일까.
하례리는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에 속하는 법정리로 알여, 알호촌, 오지리 등으로 불렸다. 큰 마을 안에 태성동, 장성도, 망장포 등 자연마을은 하례1리에, 학림동은 하례2리로 나누어졌다. 이 마을은 남원읍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한라산에서 시작된 효돈천을 경계로 서귀포시 동쪽과 경계를 이룬다. 마을 위로는 서귀포 사람들의 여름 피서지이자 폭포수를 맞는 곳으로 알려진 돈내코가 효돈천과 합해진다. 고살리 숲길은 하례2리인 학림동에 속하는 곶자왈로, 바닥이 보일 만큼 물이 맑아 붙여진 ‘내창’과 함께 환경부가 지정한 자연생태 우수마을이다. 고살리 숲길은 ‘고살리’라 부르는 샘이 있어 붙여졌다.
고살리 숲길 외에도 내창 트레킹, 감귤빵 만들기, 마을축제, 내창카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을주민의 안내로 진행하고 있다. 조용하게 골목을 산책하는 것만 해도 즐겁다. 하례마을은 ‘자연 그대로의 효례천’을 지향하며 생태와 문화 자원을 기반으로 마을 활성화를 추진하고 있다. 마을 중산간은 일찍부터 감귤농사를 지었고, 그 위로는 목장지대였다.
또 바닷가로는 망장포, 우금포, 쇠소깍으로 이어지며, 미역, 소라, 전복 등 물질을 하는 해녀의 마당이다. 주민들만 아니라 해안의 모래밭은 해수욕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해 효돈천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2002년 12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여름 숲길에 만난 생명들
하례리는 제주에서 처음으로 감귤을 재배한 시배지로 알려져 있다. 이를 살펴볼 수 있는 감귤박물관이 있다. 감귤류는 감귤속, 금감속, 탱자속 등으로 분류한다. 인도로부터 중국 중남부와 인도차이나반도에 걸친 아시아 대륙의 동남부와 주변 섬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박물관 야외에 세계 여러 나라의 감귤나무와 제주 향토재래귤 12품종을 식재해 살펴볼 수 있다. 감귤은 제주에서는 한때 ‘대학나무’라 부르기도 했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 뭍으로 유학을 간 세대에게 감귤은 각별하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진상품이었다. 그리고 진상을 위해 과원을 50여 개나 설치하기도 했다. 박물관 앞에는 현존하는 제주 감귤나무 중 가장 오래된 나무가 있다.
고살리 숲길은 자체가 곶자왈이다. 특이한 점이라면 옆으로 내창이 흐른다는 점이다. 제주도에서 곶자왈과 하천을 나란히 보며 걸을 수 있는 곳도 드물다. 이 숲길은 5.16도로와 만나고, 내창은 바다로 흘러든다. 제주시에서 출발하면 성판악을 통하지만, 동쪽 바다를 돌아보며 함덕을 지나 비자림을 거쳐 오는 길이 바다와 산을 함께 보면서 올 수 있는 길이다.
숲길은 서귀포로 들어서기 전에 남서교에서 시작되어 학림교까지 총 2.1㎞로 왕복을 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걷는 길의 경사도 심하지 않고 중간에 제주하천에서 보기 드물게 물웅덩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차를 가지고 왔다면 인근 사찰에 두고 걸어오면 된다. 입구에서 먼저 ‘자연과 약속’을 해야 걷는 일이 시작된다.
예전부터 이 터를 지켜온 자생동,식물 그리고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기며 우리들은 따뜻한 마을 공동체를 지키고, 인간과 자연의 행복한 소통을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리고 여행자로 방문하는 사람들은 ‘쓰레기를 최대한 줄이고 되가져가는 일, 숲에서 음식물 반입·취사금지 및 금연, 애완동물 동행 금지, 차량 산악자전거 이용 금지’ 등을 약속해야 하며, 탐방로를 벗어나 동식물을 헤쳐서도 안된다.
숲에 들어서면, 바로 원시림이다. 비가 온 뒤라 그 느낌이 더욱 강했다. 잠시 후 만나는 ‘장냉이도’는 물이 고여 있다. 없는 길을 나무를 잘라내고 길을 만들어 영장을 운반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어 고살리숲길의 명소이자 상징이기도 한 ‘속괴’를 만난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이 자체가 채색한 동양화다. 물이 고인 소(沼) 위로 용암절벽이 있고, 한 그루 소나무가 자란다. 마을 주민들이 안녕을 기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무속인들이 기도를 올린 흔적을 볼 수 있다.
숲길은 경사지지 않지만 돌과 나무뿌리가 많아 등산화나 바닥이 튼튼한 신발을 권한다. 나무와 바위에는 물을 흠뻑 머금은 콩난이 지천이다. 그 사이로 내창이 반짝인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그 길에서 버섯 사진을 찍고 기록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돈이 되는 일도 아닌데 기록하고 알리는 시민과학자들이다. 이들이 있어 세상이 앞으로 나간다. 그들 덕분에 처음으로 노루발풀꽃을 알게 되었다. 숲길 수종은 가시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내창을 걷다
효돈천을 걸었던 것은 20년 전이다. 몇 명의 겁없는 젊은이들과 인연이 되었다. 제주에 생태관광이라는 씨앗을 뿌릴 때다. 수학여행과 대중관광에 제주도를 맡길 수 없으며 생태와 문화와 역사를 자원을 생각하며 도전했다. 그중에 하나가 효돈천 트래킹이었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제주하천과 한라산의 생태와 인간의 적응을 이야기하며 걸었다. 그 걸음이 씨앗이 되어 유네스코 생물권 보호지역으로 결실을 맺었고, 제주생태관광을 키워냈다.
내창은 그 때 걸었던 효돈천의 일부다. 장마철이 아니면 거의 건천과 다름없다. 하지만 소나기가 오고 나면 한라산에서 정상부에서부터 내려온 물이 돌과 바위와 함께 내창에 이르러서는 엄청난 힘으로 밀고 내려온다. 이를 두고 ‘내친다’라고 표현한다. 매우 위험하지만 또 엄청난 구경거리이기도 하다. 그렇게 거친 물과 돌이 바위에 부딪히고 깎아내면서 만들어낸 모양은 인간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이렇게 내치고 나면 어른들은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목욕하고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때로는 나무를 내주고 식수를 주기도 했고,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큰 나무 아래 정성스레 소원을 빌었다. 하례리 내창 트래킹은 이렇게 제주의 자연과 섬사람들의 삶을 살피며 걷는 길이다. 하례리 삼촌의 안내를 받으면 더욱 좋다. 매년 9월에 내창을 주제로 하는 마을축제도 열린다.
마을 만들기나 생태관광는 모두 과정이다. 어느 형태든 지역주민들이 행복하게 삶을 지속하는 것을 지향한다. 더불어 여행자들도 관광을 넘어서 주민과 행복을 나누는 주체가 되는 셈이다. 그 길을 찾아 많은 전문가들이 노력하고 세금을 투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좋은 사례를 만나기 어렵다.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다. 하례리가 지향하는 마을의 미래와 공유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음에는 마을 삼촌의 안내를 받으며 고살리 숲길을 걷고 싶다.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30여년 동안 섬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문화 관련 정책연구를 한 후, 지금은 전남대학교에서 학술연구교수로 어촌공동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바다인문학, 바닷마을인문학,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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