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이효석문학상] 여행 간다 했는데, 다음날 '퇴사' 소문이 나버렸다
회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배의 말 왜곡하는 후배
실족 않으려는 욕망 그려
◆ 이효석 문학상 ◆
은재는 술자리에서 딱 한마디했을 뿐이었다. "진주가 자꾸만 우유니로 오라고 하네."
코인으로 대박이 난 친구 진주는 주인공 은재에게 페루의 우유니 소금사막행 초저가 티켓을 사줬다. 진주는 우유니 사막 근처에 살 집까지 알아볼 정도로 돈을 벌었다. 은재는 취기에 후배에게 딱 한마디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출근하니 인사과 직원이 이렇게 말한다. "쉬는 걸 고려하고 계신다면서요? 친구분이 우유니에 자리를 잡으셨다면서요. 어우, 너무 부럽다." 가뜩이나 은재는 지금 무보직 대기발령 상태다. 후배가 교묘히 정보를 짜깁기해 괴상한 소문을 퍼뜨린 것. 인사과 직원은 지금 은재에게 '드디어 사표를 쓰는 거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신주희 단편 '작은 방주들'은 무보직 대기발령을 받은 은재와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는 후배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3040 비혼 직장인은 서로의 뒤통수를 친다. 그러나 저 악의에는 자기만의 방주를 만들어 생존을 도모하려는 현대인의 슬픈 안간힘이 느껴져 처연하다.
주인공 은재는 유아교육 전문 출판사에서 7년을 근무했다. 결혼도 출산도 미뤘다. 하지만 느닷없이 무보직 대기발령을 받았다. 시대 흐름에 뒤처졌다는 이유였다. 인공지능(AI) 학습 프로그램 사업이 회사의 미래를 결정할 텐데, 흐름에 따라 조직 개편이 필요하다는 게 회사의 논리였다. 책상에 노트북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복도. 은재는 굴욕을 참는다. 그사이, 잦은 지각과 조퇴로 대기발령이 유력했던 그 후배는 콘텐츠 기획팀으로 발령을 받는다. 은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은재는 직장 동료의 결혼식을 마친 뒤 그 후배를 조수석에 태운 적이 있었다. 후배는 대화를 주도하려 하지만 은재는 알았다. 후배가 본인의 이익에 도움이 될 주제만 묻는다는 것을. 훗날 은재가 우유니 여행을 발설했다가 회사에 퇴사 소문이 돈 게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윗선에 아부하고 동료 정보를 교란시켜 자기의 살길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소설 제목 '방주'는 진주가 다녔던 회사('더 코인 아크') 이름이다. 방주라는 뜻의 '아크(ark)'는 성경 속 노아가 세계의 파도로부터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제작한 대형 구조선이었다.
현대인의 처지도 방주를 만들던 고대인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기 삶의 구원을 위해서는 직접 방주를 만들어내야 한다. 진주의 코인도, 후배의 책략도 실족(失足)하지 않으려는 현대인의 욕망일 것이다.
심사위원인 심진경 평론가는 "3040 비혼 여성이 세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또 세계에서 밀려난 이후에 벌이는 이야기다.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내재된 소설"이라고 평가했다. 이경재 평론가는 "예심에 올라온 작품 13편 가운데 (좋은 의미에서) 가장 이질적으로 느껴졌다"며 "세계를 조감하는 시선을 유지하면서 '우리 시대의 구원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1977년생 신주희 작가는 단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과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2년 '작가세계'로 데뷔했으며, 2020년 이효석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10년 넘게 카피라이터로 활동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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