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게임에도 회초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최근 행사와 신작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드디어 호요버스 턴 방식 RPG '붕괴 스타레일' 신규 스토리를 감상했다.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기대에 가득 찬 상태로 스토리를 즐긴 후 느낀 감정은 "붕괴 스타레일 혼나야겠는데"였다.
기자는 수집형 RPG 중 붕괴 스타레일에 시간을 가장 많이 투자한다. 턴 방식이 취향인 것도 있지만 전반적인 캐릭터 디자인과 그래픽이 마음에 들었다. 특별히 아끼는 캐릭터는 '제레'와 '클라라'다. 카프카와 경류가 등장하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진 두 캐릭터를 최고로 애정한다.
옆에서 지인이 제레 보고 못생겼다고 놀리면 화가 난다. 클라라는 메인 계정에서 아직 뽑지 못해 클라라 전용 계정을 새로 만들어 즐기는 중이다. 개척력을 다 소모하면 필드에서 꾸준하게 재료를 파밍할 정도로 붕괴 스타레일에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사실 워낙 좋아하는 게임이라면 업데이트가 엄청 만족스럽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게임 그럴 수 있지"라며 독려하고 다소 부족한 점이 보여도 즐거운 경험과 긍정적인 요소를 최대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선을 넘어섰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아무리 좋아하는 게임이라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라면 쓴소리는 해야 한다. 애정이 있으니까 쓴소리도 하는 거니까. 다른 붕괴 스타레일 팬들은 이해하지 못할 수 있지만 1.2 업데이트는 기자에게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아끼는 게임에게 회초리를 드는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솔직한 감상평을 남겨보려고 한다.
■ 컷신, 연출 "그래도 붕괴 스타레일이야"
- 붕괴 스타레일 EP '수룡음'
붕괴 스타레일을 적당히 좋아했다면 아마 1.2 버전에 만족했을 것이다. 기자가 붕괴 스타레일에 제대로 반했던 순간은 쿠쿠리아와의 전투였다. 화려한 연출과 전투 스케일 그로 인해 느껴지는 웅장하고도 긴장되는 분위기로 매료됐다.
1.2 업데이트 개척 임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컷신 연출은 붕괴 스타레일이 그동안 보여줬던 퀄리티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성우들의 연기 또한 흠잡을 데가 없다. 늘 캐릭터의 매력을 느끼게 해주는 성우들에게 감사할 정도다.
특히 팬틸리아가 정체를 드러냈을 때 정운의 섬뜩한 표정, 자세와 이명호 성우의 목소리가 환상적인 하모니를 이뤘다. 잠깐 공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블레이드에게 당한 단항이 음월로 각성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인연경으로 향하기 위해 바다를 가르는 음월의 모습에서는 보는 내내 설렜다. BGM도 최고였다. 특히 '수룡음'은 중국어 노래에 대한 편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감미로우면서 박진감 넘치는 모순된 분위기가 중독성을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하루 종일 반복 재생을 돌리며 감상했다.
다만 다회차를 하지 않으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의 컷신 전개는 다소 불호였다. 이는 후술할 분량 문제와도 연결된다. 1.2 개척 임무를 즐기면서 개발팀이 무언가에 쫒기는 듯 각각의 요소를 급하게 만들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헤르타, 야릴로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다. 퀄리티 자체는 뛰어났지만 전개 속도를 조절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 개연성 "이게 맞아?"
유저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기자는 1.2 개척 임무의 가장 큰 문제를 개척 임무와 번역이라 생각한다. 개연성은 분량과 연결된다. 동료 기자가 신규 개척 임무를 2시간이면 다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듣고 의문이 들었다. "약 3개월 만에 추가된 개척 임무인데 그거 밖에 안 된다고?"
분량은 동료 기자가 말한 대로였다. 텍스트 하나씩 음미하면서 즐기느라 3시간을 훌쩍 넘기긴 했지만 일반적인 속도로 감상했다면 2시간이면 족히 소화할 만한 분량이었다.
1.2 업데이트 개척 임무는 볼륨을 조금 더 크게 설계해야 했다. 시간이 짧으니까 빠르게 스킵 하는 부분이 많아 개연성 상실에 영향을 미쳤다. 스토리를 감상하면 계속 "무언가를 놓쳤나", "이전에 이런 이야기가 나왔었나"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 정체를 밝히는 팬틸리아다. '약왕의 비전' 수장과의 조우에서 정운은 갑자기 자신이 팬틸리아라는 반전을 펼친다.
스토리에서 반전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멋지게 펼쳐지는 반전은 독자들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하지만 뜬금 없는 반전은 오히려 몰입감을 저해한다. 그동안 선주 스토리에서 팬틸리아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았다. 정운에게서도 이상 현상을 감지할 수 없었다. 흔히 말하는 빌드업이 없었다. 갑자기 정운이 팬틸리아라고 하니까 당혹스러웠다.
다음은 블레이드와 단항과의 관계다. 블레이드는 복수를 위해 단항과 혈투를 벌인다. 이때 블레이드는 마치 광전사처럼 광기를 일으키며 싸웠다. 단항의 심장에 칼을 꽂아버릴 정도로 그를 증오했다. 둘의 대결을 저지하고 생포하기 위해 연경이 끼어든다. 이 과정에서 블레이드에 의해 심장을 관통 당한 단항은 음월로 각성한다.
단항이 음월로 각성했으니 블레이드는 더 강한 힘으로 음월과 맞서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갑자기 둘이 힘을 합쳐 연경과 대결한다. 연경을 빠르게 퇴장시키고 둘이 싸우는 구도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둘이 힘을 합쳐 대장군도 아닌 연경과 싸우니까 맥이 확 빠졌다.
다음은 카프카의 존재다. 카프카의 말 한 마디에 블레이드와 음월이 멈춰선다. 그리고 경원이 나타난다. 블레이드는 경원을 보자 "내가 해야 할 일을 다 했네"라고 말한다. 그리고 경원은 이해한다며 카프카와 블레이드를 놓아준다. "왜?"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치열한 전투 장면에서 갑자기 태세를 전환한 블레이드, 어떤 힘이 있는지 풀어내지도 않은 탓에 말 한 마디로 블레이드를 강아지로 만든 카프카, 둘을 싸우느라 고생한 연경을 알아주지도 않고 카프카와 블레이드를 보내주는 경원 등등 이해되지 않은 장면이 복합적으로 펼쳐지니까 스토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 번역 "그냥 일본어로 볼게요"
영화, 애니메이션, 드라마, 게임 등 콘텐츠를 즐길 때 번역에 의심을 갖지 않고 본다. 번역은 게임사와 이용자의 신뢰 관계로 이뤄질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용자가 번역에 의심을 가지고 콘텐츠를 접근하는 순간 번역이 잘못된 부분을 찾으라 진득하게 몰입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어느 정도 사소한 오역은 무의식적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번역이 이상하다고 느껴질 정도면 정말 심각한 수준이라는 의미다. 1.2 개척 임무가 그 수준이다. 번역이 정말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블레이드와 음월이 연경과 전투할 때 카프카가 개입하는 장면이었다.
"큰 인물을 모셔가기 위해 약간의 준비 작업이랄까? 어찌 됐던 나부 장군을 블레이드와 너희 둘에게 웃음거리로 만들 순 없잖아"라는 대사다. 상황만 놓고보면 큰 인물이 도대체 누구야? 세 명에게 경원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은 본인이 경원을 압도적으로 이긴다는 뜻인가? 일반적으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혹시나 해서 일본어 번역을 확인했다. 번역에서는 "앞으로 등장하실 대단한 분을 맞이하기 전의 준비 작업이랄까. 나부 장군 앞에서 블레이드와 당신들이 웃음거리가 되면 곤란하잖아?"라고 말한다. 영어 번역도 마찬가지다. 카프카는 예의를 갖춰 경원을 맞이하기 위해 블레이드, 음월, 연경을 저지한 것이었다.
사소한 곳에서도 오역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Mar. 7th가 음월에게 "단항 네가 와서 정말 좋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어 번역에서는 "어찌 됐든 단항이 와줘서 정말 잘 됐어"라고 말한다. 비슷한 것 같지만 단항이 음월로 각성한 상태를 보며 하는 말이라 뉘앙스가 엄연히 다르다.
기자는 번역에 오류가 느껴질 땐 일본어로 감상한다. 하지만 아무리 외국어에 능숙해도 모국어로 감상하는 것과 당연히 차이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는 해외에서 오래 거주한 한국 게이머들에게도 자주 들었다. 기자는 일본어를 조금 아는 수준이니까 모국어의 가치를 더 크게 느낀다.
붕괴 스타레일 번역은 이전부터 말이 많았다. 1.2 업데이트는 그 결정체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 마디로 "성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기계적으로 처리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어딘가가 책임을 질 거라는 마음이 번역 속에서 물씬 느껴졌다.
호요버스? 번역업체? 어디가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번역 프로세스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이 해결해야 할 일이다. 확실하게 지적할 대상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성의 없는 번역을 제공받았다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만 이렇게 오역이 심했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더 실망스러웠다.
기자가 즐기는 다른 게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그래서 단기간에 번역 퀄리티가 드라마틱하게 좋아지진 않으리란 걸 안다. 번역뿐만 아니라 검수 리소스도 확대하는 등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개선될 필요가 있어 시간이 걸린다.
언제까지 기다리고 싶진 않다. 당사자들의 해명, 변명을 들을 이유도 없다. 정상적인 번역을 제공하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자 의무다. 최근 인터넷 방송으로 번역 관련 이슈가 불거졌다. 이슈가 더욱더 커지기 전에 개선된 모습으로 만족감을 심어주길 바란다.
■ 선주 스토리 "언제 끝나요?"
1.2 개척 임무로 종결될 거로 예상됐던 선주 나부 스토리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지만 선주 나부 스토리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주 나부 스토리 특성상 주인공보다 다른 캐릭터의 비중이 높아지는 것에는 다소 반감이 느껴졌다.
1.2 개척 임무에서 플레이어인 개척자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물으면 "주인공이었어"라고 선뜻 대답할 수 없다. 실제로 1.2 스토리의 주연은 음월과 경원이었다. 팬틸리아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때 경원은 개척자가 아닌 "단항, 지금이야"라며 단항을 부른다.
개척자가 주체가 되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닌 3자 입장에서 각 캐릭터들이 특정 상황을 해결하는 것을 지켜보는 구도니까 때때로 답답하고 지루할 때도 있었다. 이러한 구도 탓에 스토리를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재밌게 감성했던 선주 나부 스토리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마음이 조금씩 생겼다.
1.2 스토리 분량이 적으니까 제대로 풀어낸 것이 없는 것도 문제다. 팬틸리아가 도망가고 그대로 스토리가 종료된다. 쿠키 영상이나 복선이라도 남겨주면 기대감이라도 생길 텐데 칼같이 종료하니까 마음이 아팠다.
이외에도 블레이드가 단항을 왜 죽이고 싶어하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서브 퀘스트로 일부 보여주지만 모두 추측일 뿐이지 확실하지 않다. 관련 캐릭터 중 하나인 경류는 커녕 나찰 스토리도 여전히 남아있다. 선주 스토리가 언제 끝날 지도 미지수다.
물론 1.3 스토리에서는 단점이 개선될 수도 있다. 음월과 경원이 팬틸리아를 제압하지 못했으니 개척자가 직접 나서는 모습을 기대할 만하다. 다만 분량이 비슷하다면 또 현재 풀어내야 할 복선들을 전부 해결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 다음 업데이트로 미루는 흐름이라면 한동안 그 답답한 감정을 반복해서 느껴야 할 수 있다.
총평하면 1.2 스토리는 "이걸 1.1 업데이트에서 보여줬으면 좋았잖아"였다. 물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기준이다. 업데이트마다 스토리를 전개했다면 그 반감이 비교적 적었을 거라는 의미다. 오랜만에 선보인 스토리니까 기대감이 너무 커서 실망감이 배로 느껴졌다.
붕괴 스타레일의 전체 스토리 자체는 훌륭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발진만 아는 영역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과정이 부실하다면 한정된 영역만 감상할 수 있는 이용자들 입장에선 실망할 수밖에 없다. 1.2 버전으로 향후 업데이트에 대한 기대감보다 불안감이 더 커졌다. 너무나도 좋아하는 게임이니까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본적인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고 1.3 업데이트에서는 분위기 반전 카드를 꺼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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