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현장] 27m 위에서 맨몸 점프…최병화, “살아있다는 걸 느끼잖아요”
꼴찌했지만...“난 살아남았다”
현장은 축제장 방불케 해
세계수영선수권엔 하이다이빙(High Diving)이란 종목이 있다. 2013년 도입된 신생 종목이다.
아파트 10층 높이인 27m 상공에서 물을 향해 몸을 던진다. 정말 높다. 물에 들어가기까지 단 3초, 시속 100km에 가까운 속도의 낙하. 자칫 잘못 입수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입수 지점 근처엔 여러 명의 다이버와 안전요원이 대기하며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뛰어내릴까.
“그래야지 제가 살아있는지 느낄 수 있잖아요.”
한국 최초이자 유일한 ‘하이다이버’인 최병화(32·인천광역시수영연맹)는 27일 일본 후쿠오카 모모치 시사이드 파크에서 열린 2023 국제수영연맹 후쿠오카 세계선수권대회 하이다이빙 남자부 경기에서 1~4차 시기 합계 187.50점으로 전체 23명 가운데 최하위를 했다. 22위인 콜롬비아의 빅토르 오르테가 세르나(35·220.95점)와 30점 넘게 차이가 났다. 1위는 루마니아의 콘스탄틴 포포비치(35)로 472.80점을 얻었다.
총 4차 시기까지 연기하는 하이다이빙은 부상 위험 때문에 하루에 모든 일정을 소화하는 대신 2번의 시기를 이틀에 나눠 소화한다. 최병화는 지난 25일 1~2차 시기에선 합계 74.40점을 얻었고, 이날 113.10점을 보탰다.
한국 선수론 처음 나서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그는 시종일관 특유의 여유와 배짱을 잃지 않았다. 길게 기른 머리를 묶은 채 그는 ‘추락의 미(美)’를 선보였다.
앞서 1~2차 시기에서 최병화는 난도(Dive Difficulty·DD) 2.8짜리 ‘312B’ 및 3.8짜리 ‘5163B’ 연기를 시도했다. 이는 앞을 보고 뛰면서 무릎을 편 채 양손으로 하체를 감싸 창 모양을 만드는 파이크(Pike) 자세가 포함된 기술이다. 그러나 2차 시기에선 동작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했다.
마지막 3~4차 시기를 소화하는 이날에 최병화는 ‘최종 병기’를 꺼내들었다. 3차 시기에 DD 3.4짜리 ‘5161B’ 기술로 56.10점을 획득한 그는 4차 시기엔 그가 구사할 수 있는 최고난도 기술이자 여태껏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걸 선보이기로 마음먹었다. DD 3.8짜리 ‘5461B’ 기술. 이 기술은 스타트대에서 뒤로 선 채 시작한다. 3바퀴를 돌면서 마지막에 반 바퀴를 틀어서 입수하는 고난도 동작이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 최병화는 결국 1~4차 시기 통틀어 최고(最高) 득점인 57.00점을 받으며 그의 첫 세계선수권을 마무리했다.
경기 후 취재진과 만난 최병화는 말 그대로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소감을 전했다. “이번 대회 목표는 4라운드를 문제없이 끝마쳐 이 경기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며 “지금 4라운드를 성공적으로 무사히 완수했다. 만족스럽다. 저는 제가 지금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낭떠러지 끝에 4번이나 섰기 때문”이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도 사람인지라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진 못한다. “높이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히 인간이니 느끼죠. 근데 이건 명상이나 기술 수행을 하다 보면 극복할 수 있거든요.”
오히려 더 큰 두려움은 웬만한 종목의 선수들은 경험할 수 없는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는 “선수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 큰 두려움은 내가 다쳐봤던 기술, 내가 다쳐봤던 높이에 관한 것”이라며 “그리고 10년 넘게 한 (하이)다이빙의 전설적인 존재들이 다치고, 정신을 잃고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과 동료들의 치명적인 부상이나 사망”이라고 돌아봤다.
그래서 하이다이빙 선수들 사이엔 경기에 나서기 전에 일일이 다른 선수들과 껴안는 문화가 있다고 한다. 치열하게 경쟁하기 이전에 꼭 안전하자는 암묵적인 다짐인 셈이다.
최병화는 “다른 경기들은 선수 대기실이 전투적이지 않냐”면서 “우리 같은 경우엔 모든 선수들이 허그(hug)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우리 안전하게 경기 마치자’ ‘즐기자’ ‘재밌게 하자’ 면서 서로를 안아주는 문화가 있다. 우리는 서로의 실수를 바라지 않는다”고 전했다.
국내 하이다이빙 환경은 척박하다. 아직 2호 선수도 없을 만큼 그는 홀로 세계를 떠돌며 고군분투한다. 하이다이빙은 전 세계를 통틀어 상시 경기할 수 있는 곳이 손에 꼽는다. 국내엔 없다시피 하다. 준비하고 훈련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종목이다.
최병화는 자비를 들여 외국을 떠돌며 대회를 준비한 끝에 와일드카드 초청 대상으로 뽑혀 이번 세계선수권대회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국제수영연맹이 그의 실력을 인정해 세계대회에 초청한 것이다.
최병화는 “가장 어려웠던 점은 꿈을 향해서 노력을 하고자 하는 불타는 의지가 있었지만, 훈련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없었다는 것”이라며 “국내에 있는 10m나 지상훈련장 다이빙 시설물도 제가 사용하긴 어렵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불평불만은 하고 싶지 않다. (제가) 처음 하는 것이고, 아무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건 제가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라며 “국내에 없으면 해외로 나가고 그러면 된다”고 고백했다.
해병대 특수수색대 출신인 최병화는 2014년 당시 연세대(체육교육학과) 재학 중 조선일보 뉴라시아자전거원정대에 합류해 100일 동안 1만5000km 대장정을 완주했다. 대학 시절엔 조정(漕艇) 선수이자 철인 3종 선수로도 활약하는 등 체력과 담력에 있어선 항상 자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뉴라시아자전거원정을 하며 러시아의 바이칼호수에서 다이빙한 것이 하이다이빙 입문 계기가 됐다. 2016년 국내외 다이빙 연습장을 찾아다니며 본격적으로 다이빙을 시작했다. 2017년 전국 마스터스 선수권 다이빙 3관왕, 2019 광주 세계선수권대회에선 마스터스 부문 3m, 10m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시작 7년 만에 마침내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꿈을 이뤘다.
도전, 끈기, 배짱의 피는 최병화 안에 흐를 수밖에 없다. 그의 할아버지는 한국 스포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故) 최윤칠 대한육상연맹 고문이다.
최윤칠 고문은 1948년 런던 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해 38㎞까지 선두로 달렸지만, 근육 경련 탓에 결승선을 3㎞ 정도 앞두고 기권했다. 4년 뒤 6·25 전쟁이 한창일 때 나선 헬싱키 올림픽에선 4위로 레이스를 완주했다.
올림픽에선 두 차례 아쉬움이 있었지만, 최윤칠 고문은 1954년 필리핀 마닐라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선수단 사상 첫 금메달(육상 1500m)을 땄다. 최 고문은 2020년에 영면했다. “할아버지는 저한테 뭘 강요하신 적도 없고, 무언가를 주입하려고 하시지도 않았어요. 그냥 사랑해 주시기만 했습니다.”
기자가 현장에서 본 하이다이빙은 축제장을 방불케 했다. 선수들이 안전하게 다이빙을 마치면 서로 얼싸안았다. 관객들은 신나는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었고, 선수들도 때론 분위기를 내며 합세했다. 모두가 27m 상공에서 아찔하게 서 있는 선수 한 명만 주목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최병화의 남은 목표는 무엇일까. “저보다 먼저 했던 선배들이 없었을 뿐이지, 최초라서 제가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드물 것이라곤 생각하지만, 만약에 다음 세대에 하이다이빙을 꿈꾸는 선수가 우리나라에 나온다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걸 가르쳐주고 싶어요.”
최병화는 그렇게 오늘 하루도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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