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여성에게 부여한 책무 “전통적인 성역할+공적노동”[플랫]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남편들을 내세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우리 소박한 녀인들에게 있어서 행복은 가정과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서 론할 수 없다”. 북한 소설가 김홍균의 <행복한 사람들>의 한 대목이다.
이지순(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전통적 가족관계와 수평적 젠더의 공진화: 북한 소설을 중심으로’에서 이 작품을 분석하며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법과 제도는 가정과 사회에서 남녀평등 보장, 그러나 일상에서는 정형화된 성역할 유지”, “사회적 노동과 사적 노동, 가족의 생계를 모두 짊어져야 하는 (북한 여성들의) 이중고”.
이 작품은 “온성군 약품관리소를 배경으로 회계원, 제제원, 약학사 등 전문직 여성들이 공적 노동을 수행하며 가정에서 겪는 갈등”을 표현한다.
아내의 일을 존중하며 가사와 육아에 동참하는 남성도 등장한다. “남성 일과 여성 일을 구분하던 가부장적인 북한 사회의 변화” “기성세대의 성별 분업의 고정관념 해체”를 뜻한다. 이런 변화에도 여전히 “가정일과 자녀 양육, 자녀교육이 여성의 것이라는 인식”이 소설 바탕을 이룬다. 이지순은 이런 인식이 ‘전통적인 젠더 의식’을 재생산한다고 본다. 소설 속 아내는 “ ‘남편이 하늘’이라고 생각”하고, “육아와 가사에 적극적인 남편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이지순은 이 소설 내용을 북한 정책과 연결해 들여다본다. 김정은은 2016년 조선민주여성동맹 제6차 대회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녀맹조직들은 가두녀성들을 사회에 진출시키기 위한 사업을 짜고들어야” 한다고 했다. ‘가두녀성(街頭女性)’은 ‘전업주부’를 뜻하는 말이다.
이지순은 여성 권리 신장에 대한 국제사회 요구에 북한은 여성의 사회진출 확대로 대응했다고 본다. 그는 사회진출 독려가 국가 가부장제를 더 강화한다고 분석한다. “ ‘가사보다 국사’를 앞세우는 것이 마땅한 인민의 본분이 됨에 따라 여성에게 중요한 것은 가정보다 국가의 이익과 존립에 먼저 힘쓰는 것이라는 사회적 담론과 결부”됐다.
이지순은 ‘국가 가부장제의 강화’ 결과 여성은 “전통적 성역할 + 생계 책임자 + 사회와 국가발전을 위한 노동동원 + 공식노동”을 맡았다고 본다.
📌[플랫]‘혁명적 여성’이라고 부르지만, 일상은 가부장적인 이중구조···북한판 ‘성의 역사’
최휘(노동당 고위 간부)는 2018년 “혁명선배를 존대하고 스승과 웃사람을 존경하며 안해로서, 며느리로서 가정과 사회 앞에 지닌 도덕적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고 했다. “여성들에게 부과된 현모양처와 같은 전통적 가치관과 경제활동의 이중 부담은 소자녀 선호와 출산율 하락의 결과”로 이어진다. 임신중단과 비출산, 소자녀 선호, 남아선호를 다룬 소설이 리춘미의 <사랑하라>이다. “시 인민병원 산부인과 과장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 남편을 설득해달라는 무용배우의 부탁을 받아 아들만 다섯 집의 막내 며느리인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며 출산을 장려하는 액자형 소설”이다.
이 소설은 “여성들에게 다자녀를 출산하여 미래의 주인공을 혁명의 계승자로 양육하는 모성영웅 역할과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노력영웅이 되어 국가 건설과 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요구”하는 북한 정책에 부응한다. 김정은은 2016년 “아들딸을 많이 낳아 잘 키우는 것은 나라와 민족의 전도와 관련되는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2012년 11월16일 제정된 ‘어머니날’ 이후 “자녀를 많이 낳는 여성이 모성영웅으로 호출”됐다.
이지순은 배경휘 소설 <첫걸음>에서 장남의 부모 부양, 대 잇기 등 전통적 습속을 살핀다. 북한은 남존여비를 “착취사회의 반동적 윤리도덕관”으로 규정하면서도 이런 습속이 남았다.
“어머니가 두 번째로 임신했을 때 병원에서는 딸이라고 알려주었는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얼마나 실망했는지 입맛을 다 젖히고 자리에 드러누워 앓기까지 하였다”(<첫걸음> 중).
이 소설에도 <행복한 사람들>에서처럼 성별 분업의 균열이 나온다. “녀잔 운전사를 못해”라는 반대에도 대형트럭 운전사 아버지 직업을 승계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이지순은 남북문화예술연구회(회장 오창은 중앙대 교수)와 동국대 북한학연구소 주최로 지난 7일 열린 학술대회 ‘세 가지 키워드로 이해하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사회와 문학예술 레트로, 뉴트로, 테크노’ 중 이 내용을 알렸다.
김성수(성균관대 학부대학 글쓰기교수)는 ‘김정은 시대 3기 팬데믹 시기(2020-23) 북한문학 동향’을 발표했다.
2020년 코로나19 발생 초기 단계 북한문학은 “북한 내 발병 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나라의 대재앙을 강 건너 불 보듯 여기면서 자신들은 단합된 봉쇄정책으로 악성전염병에서 안전한 것처럼 일상을 그렸다. 오히려 사회주의적 보건 위생과 주체의학체계의 우수성을 반복 선전”했다.
예를 들어 시 ‘보건전사 그 영예 빛내여가리’(2020년 3월) 한 대목은 “위대한 수령님들 마련해주신/ 가장 우월한 사회주의보건제도의 혜택 속에서/ 우리 인민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려가도록 / 나의 진정 다 쏟으리라”이다.
김성수는 2021년 전면 봉쇄기 문학적 형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코로나 청정국, 발병자 0명 통계’를 내세우다가 2022년 5월12일 당 정치국회의에서 발병 사실을 공식화했다. “청정국이란 허구 속에 은폐되었던 ‘대동란’의 진실이 비로소 봇물 터지듯” 드러나자 “추상적 문구와 관념적 문장으로 획일화”한 방역 승리 찬가가 문학에 나타났다. 김성수는 “북한문학 특유의 ‘수령 형상 문학’의 규범화된 서사(스토리텔링)인 최고지도자의 만기친람(萬機親覽)식 영도에 의한 고난 극복과 승리 공식이 상투적으로 반복된 클리셰에 불과하다”고 했다. 장시 ‘고요한 거리에서’(2022년 6월)는 ‘방역대전의 성과작’으로 칭송받은 작품이다. “지도자의 헌신과 의료진의 ‘정성’이란 상징어로 3개월(2022년 5~8월) 만에 방역에 성공했음을 자축”하는 내용이다.
“고마운 우리 군대 덕이지요. 노래에도 있듯이 자랑하고 싶은 우리 군대, 군대 없이 못 사는 우리 인민이 아니겠소”(석원영의 ‘군대 없이 못 살아’ 중) 같은 군대의 방역조치를 찬양하는 수필도 나왔다.
코로나19를 그린 작품 대부분이 “지도자의 위대함과 사회주의-주체체제의 우월성을 재삼 확인했다는 상투적 선전”이다. “‘과학기술 룡마’를 탄 청년 과학기술자와 ‘방역대전’에서 승리한 붉은 보건 전사”란 형상이 문학에 등장한다. 김성수는 “국제사회의 인도적 도움을 거부하고 자력갱생만으로 초유의 전염병과의 ‘방역대전’에서 승리했다는 폐쇄체제의 사회적 신화를 문학작품으로 치장한 것은 공허한 정신승리의 노래가 아닐까”라고 했다.
김민선(성신여대 강사)은 ‘기괴한 레트로: 북한을 소비하는 장면들’을 발표했다. 북한 사람 어조를 활용해 희화화를 시도하는 고농축의 ‘고구마 혁명토비’ 등 여러 유튜브 영상을 분석한다. 이들 영상은 “폭력적이며 비이성적인 북한의 체제와 이를 유지하는 권력층, 그리고 이들로 인해 고통받는 인민들의 구도가 유머나 B급 감성의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안정적이고 서구적이며 합리적인 남한과 미숙하고 불안정하며 비합리적(혹은 야만의)인 북한”이라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를 종편 예능 프로그램의 남북한 구도를 반복한 것이다.
김민선은 “이들 영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영어를 어색한 (북)한국어로 번안하면서 생기는 웃음과, 굶주리는 삶, 호전적인 이미지이다. 과도한 번안으로 만드는 웃음에는 한국의 문화를 서구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두고, 이를 북한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서구적이며 시대에 뒤처진 방식으로 번안해야 한다는 시선이 깔려 있다”고 했다.
김민선은 북한 영상을 즐기는 ‘한국’의 유튜브 유저들의 정동(情動)도 분석한다. “이른바 ‘국뽕영상’이 한국의 문화나 콘텐츠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내용을 장대한 음악과 함께 설명함으로써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부채질한다면, 이들 영상은 북한을 야만화함으로써 한국인임을 ‘다행으로’ 여기게 한다.”
📌[플랫]북한 여성을 통해 바라본 ‘한반도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김민선은 2018년 5월에 팝업스토어로 진행한 ‘평양 슈퍼마케트’ 프로젝트와 2019년 전시회 ‘Made in North Korea: 조선의 레트로’도 분석한다. 그는 “마치 1980-1990년대의 디자인을 떠올리게 하는, 그리고 B급 감성의 농담이 포함된 상품은 전시회와 함께 북한의 이미지를 기괴한 레트로로 ‘소비’하게 만든다. 이 전시는 북한 사회의 일상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지만, 동시에 대상화된 방식으로 북한을 소비하게 만드는 과정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연분홍빛의, 1980-1990년대풍으로 디자인된 상품들은 기실 북한의 디자인을 차용했다기보다, 일반이 가지고 있는 ‘북한의 이미지’ 또는 ‘북한스러운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자본주의 문화의 맥락 안에서 편집한 것에 가깝다. 이 속에서 북한의 일상은 연분홍색의 화사한, 우리가 지나온 시대의 모습으로 변모한다”고 했다.
이날 조은정(성균관대)은 ‘천리마시대의 소환과 북한 청년들의 불평등 정동’, 오삼언(국립산림과학원)은 ‘북한의 끊임없는 변주, ‘애국심’과 생태환경의 결합‘, 이예찬(성균관대)은 ’분단을 넘나드는 남대현: 남북의 <청춘송가> 이본들‘, 하승희(동국대)는 ’북한의 공연예술과 과학기술의 결합‘, 고자연(인하대)은 ’겉볼안’과 ‘겉치레’ 사이: 김정은 시대 사회주의 욕망의 윤리 변화‘를 발표했다.
▼ 김종목 기자 jomo@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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