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정치화’에 발목 잡힌 ‘방폐장 특별법’ [아침햇발]
[아침햇발][기후 위기]
곽정수 ㅣ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요즘 마음에 맞는 집을 지어보겠다는 로망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집 짓는 법을 배워 손수 자기집을 짓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만약 화장실이 없는 집을 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갑자기 화장실 얘기를 꺼낸 것은 사용후핵연료(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관리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한국 원전의 현실 때문이다. 한국은 24기의 원전에서 전체 전력의 30%에 육박하는 막대한 전기를 생산한다. 이들 원전에서는 지속해서 방폐물이 발생한다. 하지만 지난 40년간 위험성이 큰 고준위 방폐물 처분장(방폐장)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이러다 보니 약 1만8천톤의 방폐물이 원전 내 습식 저장시설에 임시보관 중인 불안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방폐장 없는 원전’은 ‘화장실 없는 집’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의 포화시점이 점점 다가오는 점이다. 포화시점은 2030년 한빛(영광)을 시작으로 2031년 한울(울진), 2032년 고리(부산) 등 순차적으로 도래한다. 그때까지 새 저장시설이 마련되지 않으면 원전 가동은 중단될 수밖에 없다.
방폐장 마련은 모든 원전 국가들에 쉽지 않은 과제지만, 주요국들은 관련 법률을 제정해 안전하고 민주적인 관리를 위해 노력한다. 스웨덴·핀란드는 방폐장 부지 선정이라는 성과까지 거두었다. 반면 우리는 방폐장 마련을 위한 법적 근거조차 없는 답답한 상황이다. 국회에는 김성환·김영식·이인선 의원이 각각 대표발의한 3건의 고준위 방폐장 건설을 위한 특별법 제정안이 상정돼 있지만 1~2년째 낮잠을 자고 있다. 최근에는 홍익표 의원도 방폐물 폐기법 전면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지난 13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산하 법안소위가 여덟번째로 관련 법안을 심의했다. 하지만 21일 공개된 국회 회의록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여야는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또 법안명, 정책결정체계, 관리시설 확보 시점, 기본계획 수립, 주변지역 지원 등 상당부분에서 의견접근을 보았다. 그러나 일부 쟁점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최종 합의에 실패했다.
여야는 원전 내 건식 저장시설 용량기준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한다. 정부여당은 여유있게 운영허가 기간 중 발생 예측량을 기준으로 하자는 주장이다. 반면 야당은 보다 엄격하게 설계수명 기간 중 발생 예측량으로 하자고 맞선다.
정부가 법안 심사 3일 전에 느닷없이 신규 원전 검토 방침을 발표한 것은 국회 논의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됐다. 법안 소위 내내 이들 두고 정부여당과 야당 간에 지루한 말씨름이 이어졌다. “반도체 이차전지와 같은 첨단제조업에 대한 투자가 많이 늘어나는 등 전력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신규 원전을 포함해 새로운 전력수급 확충을 위한 검토가 필요하다.”(강경성 산업부 제2차관) “원전을 더 짓겠다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와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중략) 반도체와 이차전지도 ‘알이(RE)100’ 요건을 충족하려면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더 빨리 늘려야 한다. (중략) 원전을 늘리겠다고 하면 법안 심의가 되겠나?”(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의원)
윤 정부가 민감한 시점에 신규 원전 검토를 공식화한 까닭은 무엇일까? 윤 정부는 대선공약으로 탈원전 폐기를 내걸었지만, 신규 원전은 국민에게 검증받은 적이 없다. 정부도 인정하듯 신규 원전 검토는 아직 시작도 안됐다. 원전 부지 확보, 송전망 구축 등 넘어야 할 산도 많다. 급박성이나 실효성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특별법을 가로막는 근본 장애물은 ‘원전강국’과 ‘탈원전’이라는 상반된 원전정책을 앞세운 여야의 정치적 대립이다. 민주당은 특별법 처리가 자칫 윤 정부의 원전 확대에 멍석을 깔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윤 정부는 ‘원전강국’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스텝이 꼬여 특별법 논의장까지 엎어버린 꼴이 됐다.
에너지 이슈도 정치적 고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은 그 정도가 너무 심해 기후위기와 탄소중립, 에너지 전환이라는 에너지 문제의 본질까지 훼손한다. 이른바 ‘에너지 정치화’의 폐해이다. 과학과 합리성에 기반해서 미래와 후손들을 위해 정책을 선택하는 대신 진영·정파·이념·정치적 득실 계산이 앞선다. ‘탈원전’과 ‘원전강국’ 역시 ‘에너지 정치화’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탈원전은 원전 비중, 재생에너지 확충 여건 등 현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이상만 추구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반면 원전강국은 탈원전을 정상화하는 수준을 넘어 원전에 과도한 드라이브를 걸며, 기후위기 대응의 방향성마저 흔들고 있다. 윤 대통령은 탈원전에 대해 “과학에 기반하지 않고 정치이념에 매몰된 국가정책”이라고 비난했는데, 지금 남의 흉을 볼 상황이 아니다.
여야는 특별법 논의를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왜곡된 ‘원전 정치화’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크게 기대할 것은 없어 보인다. 벌써 내년 총선 이전 처리는 물 건너갔다는 탄식마저 나온다. 국민의 안전과 직결되는 방폐장 문제는 결코 정치적 셈법으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탈원전이나 원전강국 논란과도 별개로 다뤄야 한다. 역대 정권이 대중적 인기에 영합한 정치 포퓰리즘으로 국제 에너지 가격의 흐름을 무시하고 전기요금을 무리하게 동결했다가 어떤 재앙을 초래했는지 국민 모두 똑똑히 보았지 않은가?
영구 방폐장 마련에는 수십년이 걸리고, 원전 내 건식 임시저장시설을 짓는 것도 7년이 소요된다. 방폐물 포화 예상시점에서 역산하면 올해가 마지노선인 셈이다. 정부여당은 지금이라도 연내 특별법 처리를 위해 신규원전 검토를 중단하고, 사회적 합의 도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야당도 대승적으로 응해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이 끝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산업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의 책임자들이라도 자리를 걸고 나서야 한다.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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