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남의 이름 빌려 사는 삶”… ‘그림자 아이’ 못 벗어나는 외국인 아동들

안산=김태호 기자 2023. 7. 27.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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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미신고 외국인 아동 4000명 추정
각종 의료·교육 혜택 제외… “기회 못누려”
“병원 갈 때도, 학교 등록 때도 명의 빌려”
전문가 “외국인 출생통보제 도입 필요해”

2004년 콩고민주공화국(민주콩고)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A(46)씨는 한국에서 남편을 만나 세 아들을 낳았다. 이 중 첫째와 둘째는 A씨가 불법체류자 신분일 때 출산했다. 불법체류자인 A씨는 첫째와 둘째를 출생신고하지 못했다. 출생신고를 할 수 있는 방법도 없을뿐더러 혹여 본국에서 A씨 가족의 소재를 알까 겁났기 때문이다.

이에 A씨 첫째 아들은 7세 때까지 그림자 아이로 살아야 했다. 또래 중에서 태권도 실력이 출중했지만 지역 대회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대회 출전 서류에 적을 수 있는 등록번호가 없었기 때문이다. 등록된 신분이 없는 삶을 살며 A씨의 아들은 “어차피 할 수 없다”는 자조만 늘었다고 한다. 병원에 갈 때도, 어린이집에 등록할 때도 A씨는 아들을 위해 다른 한국인 이름을 빌려야 했다.

27일 감사원 등에 따르면 2015년에서 2022년 사이 태어난 아이 중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외국인 아동은 4000명가량이다. 부모가 비자가 없는 난민·불법체류자거나 혼인 외 출산 등의 이유로 출생신고를 하지 못한 경우다. 이렇게 등록되지 않은 ‘외국인 그림자 아이’들은 교육·의료·복지 혜택에서 벗어나 있으며 다른 한국인의 이름을 빌려 살고 있다. 교육전문가들은 외국인 그림자 아이들의 권리 보장을 위해 조속한 전수조사와 사회보장번호 부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냈다.

지난 25일 경기 안산시 외국인 커뮤니티룸에서 만난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A(46)씨와 B(46)씨가 손을 맞잡고 있다. A씨와 B씨는 불법체류자 시절 한국에서 자녀를 낳아 자녀를 키우는 데 불편을 겪은 경험이 있다. /김태호 기자

◇ 불법체류자 부모로 인해 ‘그림자 아이’된 외국 아동들

현행법상 부모가 모두 외국인이며 국내에서 태어난 외국인 아동은 대사관을 통해 본국에 출생통보를 하고 국내에서 90일을 초과해 체류하는 경우 외국인 등록을 할 수 있다. 주민센터 등에도 출생신고를 할 수는 있지만 부모가 비자가 없다면 자녀도 국내 전산에 등록되지 않는다. 아울러 난민·불법체류자의 경우 대사관을 통한 출생통보 과정에서 자신의 소재지가 발각되고 본국으로 송환 당할까 두려워 신고를 꺼리는 실정이다. 또 다른 외국인도 “딸을 낳았을 때 출생신고를 하지 못했다”며 “언제나 본국 당국에 걸려 돌아갈까 두려운 마음이 커 자녀가 아팠을 때 큰 병원에도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림자 아이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건강보험 등을 비롯해 각종 복지 혜택에서 제외된다. 그러다 보니 다른 한국인의 이름을 빌려 병원에 수납하거나 알음알음 외국인의 편의를 봐주는 의사를 찾아 먼 길 택하기가 일쑤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것도 미등록 외국인 사정을 잘 헤아리는 외국인 주거 지역의 어린이집을 찾거나 보증을 서는 한국인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가 유행일 땐 실내 출입에 필요한 QR코드를 발급받지 못해 애를 먹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듯 외국인 그림자 아이들은 등록번호가 필요한 각종 기회 및 권리의 장에서 벗어나게 된다.

정치적 문제로 민주콩고에서 지난 2010년 한국에 온 B(46)씨는 이듬해(2011년) 한국에서 딸을 낳았다. 타지에서 어렵게 얻은 딸이지만 B씨는 행정기관에 딸의 출생신고를 할 수 없었다. B씨가 당시 비자가 없는 난민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B씨는 “한번은 딸이 열이 크게 올라 매우 아팠던 적이 있었는데 출생신고가 안 돼 있다 보니 입원하지 못 할 뻔했다”고 전했다. 이어 “겨우 병원에서 다른 한국인 이름을 빌려 입원해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면서도 “몸이 아파도 남의 이름을 빌려 치료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서러웠다”고 토로했다.

일러스트=손민균

◇ “외국인 아동 차별 없이 출생통보제 적용돼야”

외국인 그림자 아이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일각에선 출생통보제를 외국인 아동에게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난달 30일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의료기관에서 정부기관에 출생정보를 통보하는 ‘출생통보제’가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그러나 가족관계등록법이 ‘국민’을 대상으로 한정하는 법률이기에 국내 거주 외국인들은 여전히 출생통보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다. 더군다나 관련 부처인 법무부는 현재 외국인 그림자 아이에 대한 조사도 진행하지 않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현재 출생 미신고 외국인 아동에 대한 전수조사를 진행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우선 등록을 통해 안전과 교육에서 소외되는 아이들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은수연 안산시글로벌청소년센터 실장은 “미등록 외국인이 자녀를 낳더라도 일단 무(無)국적으로 국적을 등록하고 사회보장번호를 부여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불법체류자나 난민은 행정 당국과 접촉을 꺼려 출생신고를 할 수 없기에 외국인 부모에게 출생신고 의무를 지울 게 아니라 의료기관에서 출산과 동시에 출생신고를 자동으로 진행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픽=손민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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