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참사·강력범죄에 떠오르는 ‘각자도생’ 정신 …“불신 사회로 이어져”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시대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다. 흉악 범죄와 재난 사태가 잇따르면서 ‘내 몸 지킬 건 나 자신뿐’이라는 분위기가 확산하고 호신·대피 관련 용품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또 교육·보육 현장에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아이에게 녹음기를 들려 보내는 학부모들이 생길 정도로 ‘학부모 민원’이 늘면서 교사들은 이에 맞서기 위한 대처법을 고민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각자도생 정신이 이웃도, 국가 시스템도 모두 믿지 못하는 ‘불신 사회’를 가속화한다고 우려했다.
27일 전날 검색 결과를 바탕으로 집계되는 네이버쇼핑 트렌드 주간 키워드 1위부터 8위까지 호신용품, 호신용 스프레이, 삼단봉, 전기충격기, 호신용 가스총, 경찰3단봉, 여성호신용품, 호신용 무기 등이 차지했다. 지난 21일 서울 신림동 번화가 한 복판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벌어져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은 칼부림 사건의 여파로 풀이된다. 대학생 정채연(23) 씨는 "‘신림동 칼부림’ 사건 동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장우산을 갖고 다닌다"며 "조만간 적당한 호신용품을 사려고 고민 중"이라고 했다.
호신 기술을 가르치는 학원도 인기다. 김동산 대한삼단봉협회 회장은 "최근 묻지마 범죄가 크게 이슈돼서 그런지 호신술을 배우겠다는 문의가 늘었다"며 "이에 맞춰 협회 차원에서 지도자 교육을 실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초등학생 딸을 키우고 있는 김지연(39) 씨도 최근 주짓수와 킥복싱 학원을 알아보고 있다. 김 씨는 "요새 세상이 흉흉해서 나도 나지만 어린 딸이 너무 걱정된다"며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해서 주짓수나 킥복싱 중 하나를 가르치려 한다"고 했다.
폭우가 쏟아진 지난 15일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 여파로 차량 탈출 도구를 구매하는 사람도 늘었다. 본래 구조활동을 하는 전문 직업군에서 쓰는 용품이지만, 일반인들도 ‘각자도생’을 위해선 미리 구비해야 한다는 게 구매자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차량용 비상 망치를 판매하는 A 씨는 "지난 폭우 이후 주문량이 갑작스럽게 쏟아진 바람에 예상치 못한 품절 사태가 발생했다"며 "빠르게 물량을 확보하느라 애먹었다"고 했다. 한 차량 동호회 사이트에는 반드시 4개 모서리를 모두 부숴야 한다는 등의 비상 차량 탈출 방법, 차량 내 비상 탈출 망치를 보관하기 적당한 공간 등이 공유되고 있었다.
보육·교육 현장에서도 각자도생의 단면이 드러난다. ‘가만히 있으면 나만 손해’라는 마음으로 아이 등원 가방 안에 위장 녹음기를 몰래 숨겨두는 학부모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인터넷 쇼핑몰에 ‘어린이집 녹음기’를 검색해보니 곰돌이, 개구리 등 다양한 캐릭터 열쇠고리 모양의 소형 녹음기가 수십 개 검색됐다. 이에 따라 어린이집 교사들도 가방 교실 밖에 두기, 동요 크게 틀어놓기 등 ‘대처법’을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어린이집 교사 B 씨는 "일부 악성 학부모들을 피해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이 등원하면 가방 수색부터 한다"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각자도생 분위기는 ‘불신 사회’의 단면이라고 분석한다. 이택광 경희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가의 보호 시스템이 처참히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이라도 챙겨보자’라는 각자도생 주의가 점점 짙어진다"며 "이렇게 개인이 원자화되면 사회가 파편화되고 공적 시스템이 불신 속에 파괴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이웃과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른다는 생각이 있고, 국가가 우리를 지키지 못한다는 불신이 각자도생 정신으로 사회를 몰아넣고 있다"며 "이로 인해 사회적 파편화가 진행되는데 또 다른 위험 사건으로 각자도생 주의 가속화되고 불신이 강화되는 반복이 계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권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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