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최초보도 한영섭기자 “잘못된 안보의식 제2의 6·25 부른다”
“평화는 절대 돈으로 살 수 없다…위기의식 없이 잘못된 안보의식 제2 6·25 불러”
종군기자로 숱한 죽을 고비 “총맞고 숨진 운전병 ‘어머니’부르던 기억 생생”
"평화는 절대 돈으로 살 수 없어요. 위기의식 없이 잘못된 안보의식을 갖는다면 제2의 6·25는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적과 대적할 수 있는, 적의 어떠한 도발도 즉각 물리칠 수 있는 강력한 군사력과 하나 된 국방·안보 의식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전협정 현장을 취재한 유일한 생존 국내 종군기자 한영섭(94)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은 70년 전 정전협정 체결 현장 상황과 관련 "양측 수석대표가 서명하는 동안에도 유엔군 폭격기가 회담장 인근 북한군 진지에 폭격을 가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어놨다"며 "증오에 찬 원수끼리 급하게 서명만 하고, 오전 10시12분에 기념촬영도 없이 헤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 회장은 당시 정전협정 체결 분위기와 관련 "판문점 회담장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50여 명의 내·외신 종군기자들은 4~5채의 회담 막사 주변에서 발표를 초조하게 기다렸다"며 "당시 한국중앙방송국(현 KBS) 기자였던 저는 A4 용지 크기의 휴대용 녹음기를 어깨에 메고, 속보를 전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타 매체 기자들도 수첩에 펜을 고정하고, 회담장 상황을 예의주시했다"며 설명했다. 한 회장은 "회담장 안에는 오전 10시 정각에 윌리엄 해리슨 중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유엔군 측 대표단이 입장했고, 반대편에서 공산군 측 수석대표 남일 대장 일행이 들어와 악수나 눈인사도 없이 자리에 앉더니 탁자 위에 놓인 각 18통의 협정서에 서명만 계속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T자형으로 된 220평의 조인식 건물 동편에는 참전 유엔 18개국 대표들이, 서편에는 북한군 장교들, 남쪽에는 중공군 장교들이 앉아있었다.
한 회장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보도하기 위해 내·외신 기자들은 뜨거운 취재 열기를 보였다"며 "그런데 넓은 조인식장에 할당된 한국인 기자석은 둘뿐이었다. 유엔 측 기자단은 100명이나 되고, 참전하지 않은 일본인 기자석도 10개가 넘었다"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는 "‘보도’ 완장을 찬 북한기자들이 모든 남한기자들의 사진을 찍어갔다. 한번은 ‘사진 찍지 말라’고 강력하게 얘기했는데, 소용없었다"며 "한국 기자들은 그들이 기자로 둔갑한 보위부 사람이라고 수군댔다. 북한기자가 인삼주를 건네 사이좋게 얘기하다가도 공산당 체제 논쟁이 불거지면 격하게 반발하며 싸우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한 회장은 "죽음 앞에서 신음하는 장병들의 최후를 지켜보면서 떨리는 손으로 기사를 써야 했다"며 "전쟁의 진실을 밝히는 종군기자로서 한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을 갖고 취재했다"고 덧붙였다.
한 회장은 6·25전쟁 발발 사실을 최초로 보도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쯤 당직이었던 위진록 아나운서가 긴급사태가 발생했다는 연락을 해왔다. 국방부에 근무하는 한 장교가 가져왔다는 보도자료 내용이 너무나 막연해 진상 파악이 어려웠다"며 " 그래서 방송과장과 함께 곧장 국방부로 가서 이선근(당시 대령) 정훈국장을 만나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당시의 어수선한 상황을 설명했다. 한 회장은 이 대령과 함께 작성한 원고를 갖고 방송국으로 돌아왔다. 오전 7시 정규방송 전인 오전 6시40분. 그는 ‘각처로 흩어져 있던 국군장병들은 속히 귀대하라’는 비상소집 명령을 뉴스 속보로 처음 보도했다.
한 회장은 "‘전면전인 것 같다’는 이 대령 말에 종군기자 훈련받은 걸 써먹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며 "그땐 겁 없던 스물세 살이었다. 일단 전쟁터에 들어가면 끝을 보고 싶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한국 최초의 종군기자인 한 회장을 시작으로 전쟁이 발발하면서 종군기자는 43명까지 늘었다. 종군기자들은 실제 전장을 취재해야 하기 때문에 각급 부대에 파견돼 목숨을 걸고 현장을 따라다녔다.
종군기자로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겼다. 한 회장은 "강원도 철원을 지나 함경남도 원산으로 가는데 차량이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머리 위에서 총알이 막 쏟아졌다. 그때 갑자기 운전석 쪽이 ‘쿵’하고 울렸고, 옆에 있던 병사가 내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신음을 냈다"며 "저는 병사의 총을 들어 미친 듯이 언덕을 향해 쐈다. 병사는 ‘어머니’를 부르면서 숨을 거뒀어요. 아직도 그 병사의 마지막 외침이 귓가를 맴돈다"고 당시의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정충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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