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전, 평화체제로의 먼 길···비핵화, 미·중 갈등을 넘어[정전70년]

박광연 기자 2023. 7. 2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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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상장 북한의 통제 아래 들어간 함박도. 직경 300m에 불과한 무인도이다. 2019년 한국 정부가 이 섬을 ‘인천 강화군 서도면 말도리 산97’라는 주소를 부여해 행정적으로 관리해온 것이 알려지면서 정치 쟁점이 됐다. 그러나 정전협정의 지도에 따르면 함박도는 도경계선(가~나) 위, 즉 북한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박종우의 <비무장지대 DMZ> 사진집, 고은사진미술관, 2020’에서 스캔

70년 한반도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은 가능할까. 북한 핵 문제는 매번 전환 논의의 발목을 잡았고, 평화체제 전환에 대한 국내 여론도 크게 갈린다. 정전협정마저 위반하는 남북의 군사적 갈등과 미국·중국의 패권 경쟁이 격화되며 한반도 평화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 한반도 위기 당사자인 남과 북이 주도적으로 평화체제 논의에 나서야 할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커졌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1953년 7월27일 시작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은 역사적으로 북한 비핵화 문제와 뗄 수 없다. 1990년대 초 북한 핵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상하자 남북기본합의서(1991년)에 처음 ‘평화 상태로의 전환’이 명시됐고, 1997~1999년 평화체제 수립을 논의하는 남·북·미·중 회담이 열렸다. 북한이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다음해인 2018년 열린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평화체제를 위한 노력이 명시됐다. 하지만 각국의 이견과 불신으로 매번 성과를 못 거두고 북한이 핵 무력을 고도화하자 평화체제 논의는 표류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 전환의 관계는 핵심 논쟁 지점이다. 북한 비핵화가 먼저라는 주장과 비핵화와 평화체제 논의를 병행하자는 주장이 진영에 따라 갈린다. 진보 세력이 주장한 병행론이 거듭 실패하고 북핵 위협이 더욱 커지자 보수 세력은 ‘선 비핵화’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대표적이다. 정성윤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는 북한 비핵화 없이 달성되기 어렵고, 비핵화가 달성되면 평화체제에 대한 실질적 동력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 기대가 수렴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제70주년을 하루 앞둔 26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관광지 내 철도 중단점 현판이 빛바래 있다. 조태형 기자

반면 평화체제 논의를 비핵화 문제에 가둬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평화의 본질은 비핵화가 아닌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주장이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핵이 없을 때도 남북의 적대성은 강했다. 평화체제는 남북이 적대적에서 우호적으로 관계를 전환하는 문제”라며 “그 과정에서 북한 핵 문제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통일을 지향하는 장기적 과정에서 남북이 힘의 대립이 아니라 긴장을 관리·축소하며 평화적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과 맞닿는다.

평화체제 전환은 정전체제 준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모인다. 최근 극도로 고조된 남북 긴장은 정전협정 위반에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대표적으로 북한은 지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으로 역대 처음으로 미사일을 쐈고 남한 영공으로 무인기를 침투시켰다. 이에 남한도 NLL 이북으로의 미사일을 발사했고 북한 영공으로 무인기를 전개했다. 서보혁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정전협정을 지키는 것이 분단 고착화가 아니라 남북 신뢰 구축의 신호가 될 수 있는 역설적인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남북의 군사적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면서 평화를 위한 대화와 소통은 절실해졌지만 당장 유의미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남북 대화가 시작된 이래 역대 가장 긴 기간 대화가 단절돼있다. 약 5년 전인 2018년 12월이 마지막이었다.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는 남한 정부의 대화 의지는 진정성을 의심받는다. 북한은 남한을 대화 상대로조차 여기지 않고 있고 지난 4월 남북 통신연락선을 모두 끊어버렸다.

남북이 우회적으로 소통하는 대안도 거론된다. 서로의 이해관계에 부합할 수 있는 유엔 등 국제기구를 접촉 매개로 삼자는 주장이다. 서 연구위원은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제가 더 어려워진 북한은 국제기구와 협력을 재개해 식량·보건 지원 등 실익을 얻을 수 있다”며 “가치외교와 국제적 기여를 강조하는 한국 정부는 북한에 ‘글로벌 스탠다드’를 학습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대화와 소통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은 평화체제 전환을 위해 필수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한반도 운명을 좌우하는 동북아시아 정세가 그 어느 때보다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국제정세의 틀을 바꾸고 있는 미·중 패권 갈등이 자리잡고 있다. 과거 한반도 평화 논의의 전제였던 미·중 협력을 끌어내기 어려워졌고, 한반도는 두 강대국이 서로를 전략적으로 견제하는 최전선이 됐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북한의 ‘반미’ 핵·미사일 개발을 두둔하고 미국은 동맹인 한국·일본과의 대북 군사 협력을 강화했다. 그 결과 ‘북·중·러 대 한·미·일’ 신냉전 구조가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다.

미·중 관계 개선 없이는 한반도 평화 논의도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하지만 미·중관계는 남북의 손을 떠나 있는 문제다. 이럴 때일수록 남북이 평화체제 전환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반도 평화는 이 지역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남북 주민의 생존과 안정에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철원역은 기차가 서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폐허가 된 뒤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철원역은 서울 용산에서 시작해 원산까지 223.7㎞에 이르는 경원선의 중간역이자 금강산 내금강까지 116.6㎞ 철로의 시발점으로 남과 북을 아우르는 곳이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철길은 7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어지지 못했다. 열차가 지나지 않는 철로에는 이끼만 끼어있었고, 선로에는 종아리를 훌쩍 넘기는 잡초들이 무성했다. 정전협정 70주년을 하루 앞둔 26일 강원 철원군 외촌리 철원역 선로에 풀이 무성하게 나있다. 권도현 기자

홍 실장은 “남북의 주도적인 변화 노력이 없으면 미·중 갈등 구조에 휩쓸려 평화와 통일은 더욱 불가능해진다”며 “상호 위협을 줄이려는 남북의 자체적인 노력이 시작되면 주변국들도 한반도 문제를 정치적 수로만 이용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적 차원의 통일 논리보다는 개개인이 한반도에서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권리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반도 주변의 안보 질서를 재정립하는 외교적 노력이 중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김학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현재 한·미·일이 주도적으로 북·중·러를 끌고 가기 어려운 힘의 균형 상태”라며 “대화와 협력이 가능한 동북아의 새로운 다자적 안보 질서를 모색하는 속에서 비핵화와 종전선언, 평화협정 문제가 다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체제를 논의하기 위한 국내적 동력 확보도 중요하다. 현 정부 들어 종전과 평화체제 논의가 정치적·이념적 공방으로 전락하면서 방향성과 국민적 공감대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남북 대화와 종전선언을 추진한 전임 문재인 정부를 겨냥해 “적의 선의에 의존한 가짜 평화” “반국가 세력”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종전과 평화체제를 ‘좌파·진보 세력’의 주장으로 바라보는 접근법에서 벗어나 건설적 논의를 재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보수 성향의 노태우 정부가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공동으로 노력한다”고 명시한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서 연구위원은 “정권을 초월해 초당적인 대북정책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며 “여러 가지 이유로 남북 합의 이행이 어렵다고 해도 원칙적으로 이를 존중하고 이행해나간다는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광연 기자 lightyea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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