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 미쳤어” 사이비 신자를 향한 손가락질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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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 또는 가족이 자신이 지녀온 '어떤 믿음'을 고백하며 "우리 함께 믿어보자"고 애원한다면 어떨까.
당신은 분명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의 믿음까지 믿어줄 수 없다면 어떨까.
각각의 믿음,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서로 연결돼 세계를 공유하거나 무너뜨린다.
완벽한 믿음은 불가능해도, 온전한 사랑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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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 또는 가족이 자신이 지녀온 ‘어떤 믿음'을 고백하며 “우리 함께 믿어보자”고 애원한다면 어떨까. 당신은 분명 그 사람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의 믿음까지 믿어줄 수 없다면 어떨까. 사랑인가 믿음인가.
<탱크>(김희재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는 관계를 가로지를 만큼 간절한 ‘믿음’을 열쇳말로 다룬 소설이다. 보충하자면,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못하는 자들’의 사랑 이야기다. 소설 속 믿는 자들은 ‘탱크(Tank) 커뮤니티'를 이룬다. 탱크는 ‘서브컨셔스(Subconscious·잠재의식) 탱크’를 줄인 말로, 기도하는 공간인 상자형 컨테이너를 가리킨다. 탱크는 버스로 수시간 이동해야 하는 외딴 마을 근처 산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예약제로 운영된다.
탱크 커뮤니티는 종교와 자기계발, 마음챙김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자율적 기도 시스템”이다. 지도자, 교리, 단체 의례는 없다. 탱크 소유주, 예약 매니저가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 ‘믿는 대로 이뤄진다’며 잠재의식과 조우하기를 권하는 <시크릿>류의 자기계발서를 공간으로 구현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탱크를 찾는 건 <시크릿>이 약속한 부와 성공을 바라기보다,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이렇게나 죽을힘을 쓰는” 절박한 사람들이다. 도선과 둡둡은 가족을 되찾길 바라며 탱크에서 기도한다. 도선은 경제력이 없어 양육권을 남편에게 넘겨야 했던 딸, 둡둡은 자신의 ‘커밍아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와 멀리 떨어져 지낸다. 둡둡의 연인 양우는 탱크를 “상술”이라 여기지만, 연인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한다. 탱크 매니저 손부경이 이부자매 황영경의 믿음에 동조하는 척하는 이유도, 세상에 남은 단 한 명의 가족 곁에 있고 싶어서다.
이들은 탱크 ‘덕분에’ 혹은 탱크 ‘때문에’, 몇 가지 “재해”와 우연한 만남을 겪으며 변화한다. 각각의 믿음,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서로 연결돼 세계를 공유하거나 무너뜨린다. 그 과정이 회당 30분짜리 12부작 웰메이드 오티티(OTT)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손에 땀을 쥐도록 전개된다. 신인 작가가 낸 첫 장편이라고 믿기 어려울 흡입력이다.
<탱크>는 2023년 제28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는데, 이례적으로 최종심 30분 만에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결정 났다고 한다. 심사에 참여한 소설가와 문학평론가들은 <탱크>의 문학적 완성도는 물론 윤리적 태도를 상찬했다. 실화였다면 ‘사이비종교’로 납작하게 보도되고 말았을 ‘광신도’와 그 ‘피해자’들에 대해, “결코 냉소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균형감각”을 유지한다.(소설가 강화길 심사평) “시대의 고통이라고 축약하거나 구조 위에서 사태를 굽어보지 않고, 그 속으로 들어가 믿는 사람의 감성 형식을 알려 한다.”(문학평론가 김건형 심사평) 소설에서 탱크는 일상의 일부인데, 그렇다고 사이비가 아니라고 변호되는 것도 아니다. ‘사이비 대 진짜’라는 구도 자체가 무의미한 이유는 사람의 마음이 주인공이어서다.
‘나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서 사이비에 절대 빠질 일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 자신의 세계관만이 상식이자 정의라고 믿으며 타인을 비판하는 사람이 이 소설을 읽었으면 한다. <탱크>는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전에 ‘잠깐 기다리는 사람’이 돼보길 권한다. 기다림이 꼭 헤아림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소끔 기다리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일 수 있다고 알려준다. 완벽한 믿음은 불가능해도, 온전한 사랑은 가능하다. 사랑은 이해고 믿음이고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아서다.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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