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 만들어야” [헤경이 만난 사람-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
국가·공동체 떠올릴 콘텐츠 구상
전쟁기념관, 국방부 소관 바람직
30여년 된 노후화 시설 개선 시급
27일 6·25전쟁 정전협정이 70주년을 맞았다. 헤럴드경제는 정전 70주년을 맞아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 회장을 만났다. 전쟁기념사업회는 전쟁의 교훈을 알림으로써 건국·산업화·민주화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대한민국의 전쟁 예방과 통일 여건 조성을 목표로 하는 국가기관이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백 회장과 인터뷰를 가진 26일은 그가 취임한 지 꼭 100일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한국국방연구원(KIDA) 연구원 출신으로 최연소 국방부 차관과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백 회장으로부터 70주년을 맞은 정전협정의 의미, 그리고 전쟁기념사업회와 전쟁기념관의 미래에 대한 구상을 들었다.
▶“김정은의 입 통한 해결 실패”=“총론적으로 정전협정은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지킨 협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정전을 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학자로서, 정치인으로서 한반도 문제와 정전협정 문제에 천착해 온 백 회장은 정전협정에 대해 “무엇보다 오늘의 평화와 번영을 지키는 토대가 됐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동시에 정전 이후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과제도 안겨주고 있다”며 “헌법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위해 노력하도록 명시한 데 따라 평화통일로 가는 과정을 어떻게 설계하고,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백 회장은 지난 정부에서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던 종전선언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정전협정을 뛰어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과제를 김정은의 입술, 북한의 구두약속을 통해 해결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도 않고 실패했다”며 “종전선언 자체는 정전협정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특히 베트남 독립 인정과 미군 철수, 전쟁 중단 등에 합의했지만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함락으로 막을 내린 ‘파리 평화협정’을 언급한 뒤 “선언과 협정에 의존하는 평화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면서 “협정을 위반했을 때 페널티를 가할 수 있는 현실적 힘이 없으면 무의미하다”고 지적했다.
백 회장은 그러면서 새로운 질서 창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인 남북한의 참여와 주도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한반도에서 미래 교전이 발생한다고 할 때 당사자가 누구겠느냐. 다른 국가들은 불확실성이 있지만 남북한은 확실한 것 아니냐”며 “정전협정 당사자의 문제로 볼 게 아니라 미래 교전 가능성이 있는 당사자들이 실질적인 협력을 선언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전협정 이후 체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한국을 배제한 채 정전협정에 참여했던 국제연합군을 대표한 미국과 북한, 중국 등이 주도해야 한다는 북한의 논리를 반박한 것이다.
그는 이어 “미국 끌어들이고, 중국 끌어들여 종전선언을 할 게 아니라 미래의 새로운 질서의 당사자인 남북한이 군사적 신뢰를 쌓고 담보장치를 만들어야 한다”며 “그런데 지금 북한 핵문제 때문에 막혀 있는 것인데, 결국 북핵문제를 해결하고 여기서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남북한이 지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약속을 해야 새로운 질서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또 “결국 미래 교전 가능성 있는 당사국은 남북한이니 남북한이 군사적 신뢰를 구축해야 하고, 군사적 신뢰를 위한 첫 번째 단추는 북핵 폐기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 회장은 미중 패권경쟁 심화에 따라 한반도정세와 동북아정세가 점차 복잡다단해지는 상황과 관련해선 미국과 동맹관계를 공고히 해나가는 가운데 중국, 러시아를 설득하면서 관계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먼저 “동북아에서 진영대결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고, 국제정세도 우리에게 좀 불편한 게 사실”이라며 “그렇다고 우리가 미중 대결구도 속에서 중간자라든가, 눈치를 보는 애매한 위치를 유지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환경은 아니다”고 진단했다.
이어 “현재로선 어느 국가지도자라도 안보와 군사 차원에서는 미국과 동맹관계를 중시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비롯한 서방진영과 관계 강화를 선명히 해야 한다”며 “그렇다고 중국과 러시아와 관계가 어려움에 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제가 중국 측 인사들과 만날 때마다 윤석열 정부가 중국과 각을 세우려는 게 아니라 앞의 정부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드(THAAD)와 관련한 ‘3불(不)·1한(限)’과 같은 잘못된 대중정책과 각을 세우려는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이 같은 설득이 필요하다”면서 “조속한 한중정상회담 개최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제안했다.
전쟁기념사업회는 이날 전쟁기념관에서 ‘1953~2023년 한반도, 남북 군사관계의 과거·현재·미래: 도전과 과제 그리고 우리의 대응’을 주제로 이종찬 광복회장과 김학준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학술회의를 개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전쟁기념관 찾은 미래세대 국가 중요성 깨달았으면”=학자와 행정가, 정치인으로서 외교안보분야에서 다양한 이론적, 실무적 경험을 쌓은 백 회장은 전쟁기념사업회의 공공외교 지평 확대에 공을 기울이고 있다.
그가 취임한 이후 100일 남짓 기간 동안 자비에 베텔 룩셈부르크 총리와 신디 키로 뉴질랜드 총독,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 등 20여국에 가까운 해외의 주요인사들이 전쟁기념관을 찾았다.
특히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전쟁기념사업회와 전쟁기념관은 한국을 찾는 해외 주요인사들의 필수 방문코스로 자리 잡고 있다는 후문이다.
백 회장은 “대통령실 이전과 코로나19 종식 등이 겹쳤기 때문이겠지만 많은 국가의 군사안보관계자는 물론 정치지도자들의 방문과 만나자는 요청이 대단히 많다”며 “전쟁기념사업회가 국가적 차원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래도 정치외교학을 공부했고 국방부 차관이나 국회의원을 할 때도 군사외교, 방산외교 등에 관심이 많았는데 공공외교에 관심이 간다”며 “전쟁기념사업회가 공공외교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6·25전쟁 참전국 같은 경우 과거 한국을 도와준 데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고, 이를 통해 한국과 협력을 증대시키는 데 디딤돌이 되기를 바란다는 강한 메시지를 보낸다”며 “저는 대한민국이 여러분 덕분에 어려운 시절을 잘 극복하고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다는 얘기와 함께 이를 바탕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가고 현안문제를 해결하자고 당부한다”고 전했다.
백 회장은 글렌 영킨 미 버지니아주지사가 지난 4월 전쟁기념관을 찾았을 때 미군 전사자 묘비에 헌화한 뒤 한참동안을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전사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살펴본 장면과 밀리 미 합참의장이 예정된 일정을 마치고 다시 요청해 전시실을 둘러본 일화를 언급하며 전쟁기념관에서 이뤄지는 공공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백 회장은 향후 전쟁기념사업회 운영 구상도 공개했다.
그는 먼저 ‘전쟁기념사업회법’에 전쟁의 교훈을 통해 전쟁 예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데 이바지하는 것으로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돼있다는 점을 거론한 뒤 “전쟁의 교훈을 잊지 말고 전쟁을 막고 평화 통일을 추구하자는 데 반대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우리 시대 과제를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에 맞게 콘텐츠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려 한다”고 밝혔다.
이어 “궁극적으로 전쟁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과 나갈 때 변화가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며 “전쟁기념관을 찾는 분들이 다녀가시고 나서 국가와 공동체를 더 생각하게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또 “현 세대도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미래세대들”이라며 “지금도 어린이박물관 등 인기가 좋은데, 더 좋은 콘텐츠를 많이 만들어 부모 손을 잡고 전쟁기념관을 찾은 미래세대들이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가 왜 중요한지 생각할 수 있게끔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백 회장은 이를 위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발전하는 전시 기법 도입과 전문가를 활용한 실질적인 자문위원회 운영 등을 구상중이다.
취임하자마자 젊은 직원들을 해외로 보내 해외 전시 실태를 살펴보고 오도록 하고, 전쟁기념관 6·25전쟁실 내 새로 구축할 ‘국군포로실’과 관련해 아프가니스탄 참전용사로 ‘퍼플하트’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 제이슨 박 버지니아주 보훈·병무부 부장관과 그의 부친 박영태 예비역 대령 등과 자문위원회를 개최한 것은 이의 일환이었다.
▶“전쟁기념관 관할 보훈부보다 국방부가 적합”=백 회장은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도 거침이 없었다.
그는 국가보훈처의 국가보훈부 승격 뒤 본격적으로 대두된 전쟁기념관의 보훈부 관할 주장에 대해 국방부 소관으로 두는 게 보다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백 회장은 “사실 이 문제는 국회와 정부에서 다룰 사안이기 때문에 전쟁기념사업회장으로서 당자사라 할 수 있는 입장에서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부분이 있다”면서도 “개인적으로는 국방부 소관으로 있는 게 맞다고 본다”고 단언했다.
그는 “전쟁기념관 터는 과거 육군본부가 있었고, 국방부나 군 입장에서는 어떤 성지처럼 여겨지고 있다”며 “또 전쟁기념사업회 업무가 전시와 교육을 통해 군 정신전력 강화 프로그램과도 연결되는데, 이런 군의 정서적 측면이나 정신전력에 기여하는 부분을 고려하면 소관 이전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일부 추모시설이 있어서 보훈부 업무와 맞닿은 측면도 있지만 추모는 국방부 입장에서도 중요한 사안”이라면서 “부처 이기주의가 들어갈 여지는 없다”고 덧붙였다.
백 회장은 아울러 다른 국가기관에 비해 열악한 직원들 처우 개선과 1990년대 초반 착공·개관하면서 노후화 된 시설 개선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그는 “와서 보니 다른 기관에 비해 직원들 처우가 안좋은 편”이라며 “직원들 전문성 향상을 위해 투자도 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창피한 얘기지만 개관한 지 30여년이 되다보니 시설 노후화 문제도 있다”면서 “외빈들도 자주 오는데 빗물이 새니 말이 되느냐”고 토로했다.
백 회장은 이 같은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늘어놓은 뒤 “재정문제에 있어서 신규사업을 하기 쉽지 않은데 결국 노력이 문제”라며 “개인적으로 국회 경험도 있고 해서 어려운 것도 알지만 또 가는 길도 알고 있는데 기획재정부와 국방부를 찾아 통사정을 하려 한다”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신대원·오상현 기자
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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