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립미술관장 곳곳 공석, 시장 반토막…한국 미술판의 위기

노형석 2023. 7. 27.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현관. 최근 관장과 학예실장 등 주요 보직이 모두 비면서 운영사령탑이 사라진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노형석 기자

올여름 한국 미술판은 짙은 먹구름에 뒤덮였다.

미술계 제도를 대표하는 주요 국공립미술관은 관장 공석 상태이거나 행정직 공무원들이 관장을 차지하는 파행상태에 놓였다. 또 다른 축인 미술시장은 거래량 급감으로 지난해보다 매출 규모가 반 토막 나고 화랑가 거래나 작품 장터들도 찬바람만 부는 냉각기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나 올 초만 해도 미술시장의 내리막 조짐이 눈에 띄긴 했지만, 미술관 전시나 운영, 경기 전망 등에서 낙관론이 강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삽시간에 불거진 퇴행과 하향의 양상들은 심각할 정도로 우려스럽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지난 5월26일부터 이달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기획전 ‘한국실험미술 1960~70년대’의 전시장 들머리. 당시 국내 전위미술 운동을 주도했던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정강자 작가가 1967년 만들었던 설치조형물 ‘키스미’(2001년 다시 제작한 작품)가 정면에 나왔다. 노형석 기자

■ 국현·부산·대구 모두 수장 비었다

현재 한국미술판의 침체와 퇴행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이 국공립미술관 수장들의 공석 사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부산시립미술관, 대구미술관, 경기도미술관 등 주요 국공립미술관의 수장들이 모두 자리가 비는 역대 전례 없는 상황을 맞고 있다. 임기를 상당수 남겨놓은 상황에서 정권의 압박이나 내부 운영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 등으로 퇴진한 사례가 잇따랐다.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전시기관인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도부 공백에 따른 운영 파행이 가장 심각하다. 지난 하반기 진행했던 학예실장 공모를 두고 윤범모 전 관장과 상부 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와 마찰을 빚으면서 계속 공전한데 이어 지난 4월 윤범모 관장이 문체부의 압박성 뒷조사를 받고 중도 퇴진하면서 학예실장 등 주요 보직이 모두 비는 등 운영사령탑이 사라진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고 있다.

대구미술관장의 경우 지난 3월 임용된 지 3달여 만에 서울시립미술관장으로 옮겨간 최은주 전 관장의 사직 이후 아직도 후임자를 뽑지 못했다. 상부 기관인 대구문예진흥원이 지난 4월 안규식 전 클레이아크 김해미술관장을 신임 관장에 내정했으나 이후 부적절한 징계를 받은 전력을 찾아냈다면서 임용을 취소했고, 반발한 안씨가 민사소송으로 맞대응하면서 관장 공석 사태가 여러해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부산시립미술관은 프랑스 거장 볼탕스키 전, 일본 팝아트 거장 무라카미 다카시 전 등을 의욕적으로 벌여온 혜경 관장이 내년 11월 임기 만료를 1년 이상 남겨 둔 지난 11일 사퇴해 충격을 던졌다. 그는 연말 미술관 리모델링을 앞두고 후임자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해서라고 페이스북에 알렸으나 전시와 운영을 둘러싼 지자체, 지역미술계, 일부 학예사들과의 갈등으로 큰 상처를 입은 것이 주된 요인이 됐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별개로 행정직 공무원을 관장에 임명하는 흐름도 대전시립미술관, 수원시립미술관에 이어 강원도 양구 박수근미술관으로 확산되고 있고, 경남도립미술관의 경우는 미술학예행정에 문외한인 지역 서단의 서예가를 관장에 전격 임명했다.

학예직들은 앞서 수년 전부터 학예직들이 대거 지자체 미술관 관장에 진출하면서 미술계의 전시 콘텐츠와 운영 관행을 혁신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정치력이나 운영 역량, 공인으로서의 책임감, 윤리의식 등에서 명확한 한계를 드러내면서 급속한 퇴행적 흐름이 밀어닥친 상황이다. 현직 기획자들의 모임인 한국 큐레이터 협회는 오는 29일 오후 서울 상암동 문화비축기지에서 월례 포럼을 열어 관장직 중도 퇴진과 공백으로 흔들리는 미술관 제도에 대한 전문가들의 진단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지만, 뒷북 치기에 가깝다는 아쉬움을 사고 있다.

지난 5월 부산 해운대 벡스코에서 열린 ‘아트부산 2023’의 일부 전시장. 노형석 기자

■ 반토막 난 미술시장

미술제도의 퇴행과 더불어 도드라지는 것이 미술시장의 하강세다. 올 상반기 국내 미술 시장은 경매와 화랑시장 등 전체 규모가 지난해에 비해 절반 이상 쪼그라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KAAAI)가 이번 주 초 내놓은 ‘2023년 상반기 미술시장 분석보고서’를 보면 이런 추세가 역력하게 드러난다. 보고서를 보면, 올 상반기 국내 양대 경매사인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의 낙찰 총액은 각각 250억5000만원, 247억1000만원으로 지난해 상반기 대비 각각 64.1%, 39.0% 급감했고 낙찰률도 서울옥션 68.1%, 케이옥션 71.2%로 각각 12.8%p, 9.8%p 감소했다.

양대 경매사와 고미술품 위주의 경매업체인 마이아트옥션을 포함하면 낙찰총액은 613억7000만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7.0% 급감했다. 지난 2년 간 회복 기조가 뚜렷하던 시기 국내 시장에서 구매자들이 젊은 작가들의 유사 팝아트 등을 중심으로 과잉된 투자 열기를 보여 다른 장르의 작품 판매에 장벽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트페어로 불리는 미술품 장터에서도 이런 양상은 극명하게 드러났는데 올해 5월 열린 국내 굴지의 페어인 아트부산의 경우 지난해 국내 페어 사상 최대규모인 700억원 대를 올렸다고 발표한 매출액보다 거래량이 급감해 아예 거래액 수치를 발표하지 못했고, 앞서 열린 화랑미술제나 부산국제아트페어도 모두 거래액 감소 양상이 뚜렷했다. 화랑가의 한 중견 화상은 “시장을 떠받치던 단색조회화 큰 작품 거래가 사실상 멈췄고, 새롭게 주목하던 실험미술 분야의 작품 거래도 기대만큼 오르지 않아 화랑 시장을 움직이는 역동력이 상실된 상황”이라고 전했다.

시장 관계자들은 9월 열리는 세계적인 미술장터 프리즈와 한국화랑협회 주최의 한국국제아트페어(키아프)를 내심 기대하지만, 외국 대가 명품들을 대거 들고 올 프리즈 좌판 쏠림현상이 더욱 심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하다. 단색조 말고는 내세울 대표 상품이 없는 한국 미술시장의 빈약한 체력이 적나라하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대구시 산하 대구미술관 전시장에 내걸린 홍준표 시장의 초상화. 홍 시장과 고교 동창인 노중기 작가 개인전이 열리는 도중 다른 작품을 떼어내고 갑자기 설치돼 입길에 올랐다. 노형석 기자

■ 전시기획도 수작 찾기 어려워

미술관의 운영 공백 탓인지 올 상반기부터 여름까지는 전시 콘텐츠도 양질의 수작을 찾기 어렵다. 4년 이상의 준비 끝에 마련된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의 김환기 특별전은 가장 우뚝했다. 거장의 초창기부터 타계 때까지 수작들에 얽힌 스토리텔링과 내면의 작품의식을 추적해 큐레이팅에 녹여 넣은 기획으로 압도적인 호평을 얻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개념미술 거장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이나 백자 명품 전은 명작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백화점식 구성으로 관객 동원에는 성공했지만 맥락과 역사성을 재발굴하는 기획의 본령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현대실험미술전은 20여년 전 미술관의 실험미술기획전 구성과 작품들을 상당 부분 그대로 가져오고 정작 새로운 미술사적 연구성과는 거의 반영하지 못한 수준이하의 기획이라는 혹평을 면치 못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