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숨은영웅] 유해감식 이끄는 피란민 손녀…"무명용사들, 더늦기전 가족품에"
실종 미군 500여명 신원 확인해 가족 품으로…"기다려온 유족들 생각에 보람 느껴"
조부모 1950년 흥남철수 때 내려와…"한국전 프로젝트, 이 일 하게 된 것 운명 같아"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임미나 특파원 = "머나먼 타국의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순간, 그분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미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에서 일하는 법의학 인류학자 진주현(미국명 제니 진·44) 박사는 26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 박사는 2010년 DPAA의 전신인 합동전쟁포로·실종자 확인사령부(JPAC)에 합류해 한국전쟁에서 숨진 미군들의 유해를 감식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작업을 이끌어왔다.
'K208' 프로젝트로 시작해 최근 거의 마무리된 'K55' 프로젝트까지 13년간 한국전 유해 감식 작업으로 모두 524명의 미군 전사자가 진 박사의 손을 거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프로젝트명의 숫자는 북한이 미국에 보낸 유해 상자 수를, K는 '코리아'를 뜻한다.
K55 프로젝트는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차 북미정상회담 후속 조치로 북한이 55개 관에 담아 송환한 미군 유해를 감식하는 작업이었다. 진 박사는 그해 7월 말 직접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북한 원산을 방문해 미군 유해를 받아오기도 했다.
서울대에서 고고미술사를 전공하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스탠퍼드대에서 인류학 석사학위를,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 세계 발굴 현장을 누비며 사람과 동물 뼈를 연구했지만, 전사자 유해 감식을 업으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다고 한다.
남편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한 것을 계기로 현지에 본부가 있는 DPAA의 연구원 구인 공고를 보고 지원했고, 마침 당시 한국전 유해 확인 작업을 진행 중이던 DPAA 측이 이례적으로 한국인인 그를 채용해 한국전 프로젝트를 맡겼다.
하지만 그전까지 한국전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은 없다 보니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특히 미군 기록을 살피면서 장진호 전투를 많이 접하게 됐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이 전사도 많이 하고 동사(凍死)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장진호 전투에 관해 공부하다 보니 저희 할아버지가 흥남 철수 때 배를 타고 내려왔다던 얘기가 생각났죠."
그는 할아버지에게 전화해 그때가 언제였는지 물었고, 1950년 12월의 정확한 날짜와 배 이름까지 들을 수 있었다. 스무살에 군 징집을 피해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그의 조부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에 정착했다.
진 박사는 흥남과 가까운 장진호에서 전사한 미군들의 유해를 마주하면서 당시 젊은이들의 엇갈린 운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을 먼 나라에 가서 목숨을 잃고 집에도 못 간 무명의 미군 유해가 내 앞에 있고, 우리 할아버지는 거기서 살아남아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신기하더라고요. 저는 운명 같은 걸 믿는 사람이라, 이 일을 내가 하게 된 것이 운명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죠."
지난 5년간 진행된 K55 프로젝트는 감식 결과, 모두 250명의 유해로 확인됐다. 이 가운데 88명이 미군으로 신원이 확인됐고, 나머지 유해 중 80명은 한국군으로 추정돼 한국에 송환됐다.
진 박사는 한국군 유해가 확인돼 송환될 때 감회가 더 남다르다고 했다.
"한미동맹이 이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이 싸우고 같이 전사했고, 어느 쪽 유해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 같이 가져오는 거죠. 이분들이 미국과 한국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같이 가게 될 때 특히 보람을 느껴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서로 소통해서 (전사자들이) 집을,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는 거죠. 좌우를 떠나서 나라를 위해 싸운 분들이 돌아오는 것은 기념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유해 감식이 얼핏 들으면 쉽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힘든 작업이라고 했다.
영화나 TV 드라마에서 보는 범죄 현장의 DNA 감식과 달리, 한국전 전사자 유해는 70여년 전의 오래된 뼈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뼈에 남아있는 DNA 자체가 거의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DNA가 잘 안 나올 때는 유해에 남아있는 특징을 실종자 기록과 대조하는 작업을 벌인다. 미군은 2차대전을 거치면서 한국전 당시 참전 군인들의 기록을 체계적으로 잘 남겼다고 한다.
한국전에서 실종돼 유해를 찾지 못한 미군이 현재 7천500명 정도 남아있는데, 이들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100% 보관돼 있다고 진 박사는 전했다. 유해를 감식할 때마다 해당 전투에 참전한 군인들의 치과 기록이나 가족이 남긴 기록 등이 신원을 확인하는 데 큰 단서가 된다.
하와이 국립묘지에 안장된 한국전 참전 무명용사의 유해를 꺼내 신원을 확인하는 프로젝트를 벌였을 때는 과거 시신 운구 과정에서 방부 처리를 하는 바람에 DNA 채취가 불가능했는데, DPAA 측에서 고대 인류 네안데르탈인의 뼈를 연구하는 고(古) DNA 전문가를 채용해 5년간 분석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또 DNA 샘플은 모계로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비교하는데, 모계가 겹치는 경우가 있어 한 유해에서 나온 DNA와 매칭되는 가족이 여러 명인 경우도 있다.
진 박사는 이런 난관에 놓인 한 유해를 분석하다가 앞선 감식 보고서에서 팔과 척추에 골절 흔적이 엿보인다는 기록을 발견했고, DNA가 맞는 후보군에 있던 한 어머니가 남긴 기록 중 "아들이 어릴 때 넘어져 팔뼈를, 높은 곳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친 적이 있다"는 내용을 발견해 신원을 확인한 적도 있다고 했다.
"미군이 아들의 실종 사실을 통보했을 때 그 엄마가 어떻게 하면 아들의 유해를 찾을 수 있을까 하고 편지를 보낸 거였어요. 엄마의 그 편지 덕에 결국 아들을 찾게 됐고, 아들의 유해가 돌아가신 엄마 옆에 묻히게 됐죠. 그 사례가 굉장히 감동적이더라고요. 그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싶어서요. 저도 아이가 있어서 그런 걸 보면 막 감정이 북받쳐서 울곤 해요."
한국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함께 북한과 가까운 비무장지대(DMZ)를 방문해 유해 발굴 작업을 벌였을 때는 처절한 전쟁의 흔적에 몸서리를 쳤다고 했다.
"DMZ는 그동안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 당시의 상태가 고스란히 남아있었어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처럼 고지를 두고 서로 탈환하려고 올라가다가 총에 맞는 그런 장면이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어요. 막상 가서 그 실상을 보니 '나였다면, 내 가족이라면 얼마나 비극일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DPAA와 한국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하 국유단)은 국유단이 창설된 2007년부터 매년 공동 감식을 진행해 왔는데, 진 박사는 DPAA 대표로 매년 한국을 방문해 감식에 참여하고 있다. 올해도 한국에서 감식 활동을 벌인 뒤 이달 초 복귀했다.
그는 신원을 확인한 유해를 직접 전달하지는 않지만, 유해를 받은 가족들에게서 고맙다는 얘기를 많이 전해 듣는다.
DPAA에 따르면 2018년 4월 한국전에서 실종됐던 증조부(할머니의 아버지) 핀리 제임스 데이비스 상사의 유해를 받은 미 육군 하사 재커리 보니는 "DPAA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보니 하사는 데이비스 상사가 실종됐을 때 12세였던 할머니가 평생 아버지를 그리워했다면서 할머니가 눈을 감기 전에 유해를 찾게 돼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했다.
진 박사는 세월이 흘러 기다리는 가족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를 보면 더 안타깝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럴 때는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우리는 (당신을) 알아요'라고 생각합니다."
진 박사는 "정말 아무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는 때가 오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북한에서 유해를 더 받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며 "최대한 열심히 신원을 확인해서 실종자를 한 분이라도 더 줄여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min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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