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지상 랜드마크 이어 지하 고속도로·철로 놓는 쌍용건설
[편집자주] 국내경기의 침체와 글로벌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해외건설수주 시장을 적극 공략하며 우리경제에 큰 공헌을 했던 건설업계의 중요성이 다시 커지고 있다. 정부도 이런 해외건설시장 개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원팀코리아'를 통한 세일즈 외교에 주력하고 있다. <뉴스1>에선 아시아, 유럽, 중동 등에서 다변화, 고수익 전략을 끌어 나가는 해외건설 현장을 살펴보고 새로운 방향성을 짚어보고자 한다.
(싱가포르=뉴스1) 최서윤 기자 = 지난 20일 찾은 싱가포르 톰슨 동부해안선 지하철 T308공구. 바깥은 스콜성 소나기가 시끄럽게 퍼붓지만 지하는 각자 위치에서 집중하는 작업자들로 오히려 차분하다. 승객과 차량만 있다면 여느 전철역과 다름없는 이 현장의 전체 공정률은 97%. 이르면 올 연말 준공을 앞두고 마감 공사가 한창이다.
쌍용건설과 싱가포르의 인연은 30년도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7년 지어졌던 초대 래플스 호텔을 1991년 설계도조차 없이 복원해 낸 데 이어 2010년 준공한 마리나베이샌즈호텔은 '파리 에펠탑' 못지않은 도시 랜드마크가 됐다. 지상에서 인정받은 건축 성과를 바탕으로 이제 지하에서 토목공사 실적을 쌓아 올리고 있다.
◇'8학군'·간척지 악조건 속 국내엔 없는 비상방폭문 설치까지
싱가포르 지하철(MRT·Mass Rapid Transit) 6개 노선 중 톰슨동부해안선(TEL·Thomson-East Coast Line)은 서울 지하철 9호선처럼 가장 최근 개통한 라인이다. 북부 톰슨라인에서 남부를 거쳐 동남부해안 이스트코스트라인을 잇는 구상으로 순차 개통 중이다.
특히 이스트코스트라인은 싱가포르 강과 싱가포르 해협이 만나는 마리나 베이(Bay·灣)에서 동남부해안을 따라 창이국제공항까지 잇는 노선이다. 서울 한강 변 반포·잠실 같은 부촌이 '이스트코스트파크(East Coast Park)'를 따라 이어지는데, 기술적으론 매립한 땅 특성상 연약지반이라는 중요한 난관이 있다.
싱가포르 육상교통청(LTA)은 13km 10개 역사에 달하는 이스트코스트라인 신설 공사를 13개 구역으로 나눠 자국 및 중국·호주 등 글로벌 건설사에 발주했다. 한국에선 쌍용건설과 현대건설, 삼성물산, GS건설이 참여 중이다.
쌍용건설이 시공을 맡은 T308공구는 마린테라스(Marine Terrace)역과 1.78km 선로 및 터널 2곳과 지하보도를 포함하는 구간으로, 쌍용건설이 75% 지분율로 현대건설(25%)과 조인트벤처(JV)를 맺어 2016년 1월~2023년 2월 완공(코로나19로 10월까지 연기) 조건으로 수주했다. 공사금액은 약 3400억원 규모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일반의 눈으론 확인할 수 없는 간척지 조건보다 먼저 들어온 특징은, 주변을 숲처럼 빼곡히 에워싼 아파트 건물이었다. 교량이나 댐 같은 토목공사 현장은 으레 인적이 드문 '오지'에 있기 마련이니,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공사환경이 좋지 않느냐'는 질문에 현장 관계자는 손사래를 쳤다. 민원이 빗발친다는 것이다.
그제야 학교, 아파트 건물과 아찔할 만큼 맞닿은 현장의 지상 단면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현지서 '에이치디비(HDB)'로 불리는 공공주택이 많았는데, 서울시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가 확대 중인 토지임대부 분양주택의 모델이다. 국가 '주거개발위원회(Housing and Development Board)'에서 99년간 거주하는 조건으로 건물지분만 분양받되 토지임대료는 내지 않는 게 서울시 방식과의 차이점이다.
다소 낡고 천편일률적인 HDB 건너편으론 '콘도'로 불리는 고급 아파트가 즐비했다. 호텔 레지던스처럼 세련된 외관의 건물들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경우에 따라 대지지분까지 취득하기도 해 가장 비싼 주거형태라는 단독주택도 촌을 형성하고, 이런 각양각색 주거 건물들 사이로 '학군 좋은' 초중고교 6곳을 끼고 길게 현장이 뻗어 있었다. 즉, '예민한 이웃이 사는 곳' 지하를 뚫어 철길을 내는 공사다. 시험기간 듣기평가 땐 무조건 작업 중지란다.
현장 총책임(Project Director)을 맡고 있는 정상현 부장은 "1996년 입사 이래 지하철이나 선로가 지하로 내려가는 철도 현장 등 주로 '땅 파는 일'을 해왔지만 현재 쌍용건설이 싱가포르에서 맡고 있는 지하 현장들은 상당히 까다로운 공사"라며 "한국은 주로 단단한 땅의 돌을 깨는 게 문제였다면 지금 현장은 연약지반이 난관"이라고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현장 일대는 오래전 해안선이 위치했던 지대로, 지금도 매립지 밑엔 마린 클레이(Marine clay·해성점토)로 불리는 지층이 두껍게 깔려 있다. 만져보면 끈적끈적하고, 치약보다 단단하지만 찰흙보다는 말캉한 땅이다. 해안선이 가깝다 보니 과거 육지였던 땅에도 강물이 흘러와 고인 지점이 중간중간 껴 있어 지하 공사 시 상당한 기술과 주의를 요한다.
정 부장은 "지하철 공사 경험이 많은 게 입찰에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쌍용건설은 서울 지하철 9호선 고속터미널역 공사 당시 3·7·9호선 환승 구간에서 기존 3호선 15㎝ 아래를 지나가는, 국내 지하철 건설사상 최대 난공사를 수행해 국내외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인구 590만 규모 싱가포르도 하루 최대 3000명을 넘나드는 확진자가 발생하며 외출 금지 및 거리 봉쇄 정책을 폈다. 4개월의 '셧다운' 여파로 공기도 지연·연장되는 등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마무리공사인 건축마감(85%)만 남았다.
선로는 벌써 시운전을 시작해 발주처의 허가를 받고서야 지하 현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냉각탑을 포함한 7개의 출구와 개찰구, 스크린도어 등 익숙한 지하철역 풍경 외에도, 규제 많은 싱가포르 정부가 주문했다는 '폭탄 테러 대비용 방폭문(Civil Defense Door)'과 친환경 추세에 대응하는 자전거 주차장 및 연결 진입로가 설치됐다.
지하철역 복도에 늘 닫혀있는 줄 알았던 큰 문 안으로 기계실과 천장 내부 얽힌 관들도 볼 수 있었다. 현장 관계자들은 "해외에서 한국인으로서 회사 이름을 걸고 '창피하지만 말자'는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십몇 년이 훌쩍 지나갔다"면서 "지하철역엔 눈에 보이지 않는 기계와 시설이 훨씬 더 많은데 복잡한 공사로 이뤄진 '수공예 작품'이란 걸 기억해 달라"고 전했다.
'작품'이 완성되는 지난 7년간 T308현장은 발주처인 육상교통청을 포함해 현지 4개 기관으로부터 안전보건과 건설환경 등 분야에서 총 10회 수상했다. 컨테이너로 지어진 현장 사무실 안에는 각종 수상패가 진열돼 있었다.
◇경부고속道 지하화?…싱가포르서 공사 먼저 해본다
쌍용건설이 현재 싱가포르에서 진행 중인 토목공사 현장으로는 지하철 외에도 도심 지하고속도로 2개 공구가 더 있다. 육상교통청이 남북을 가로지르는 21.5㎞ 도심 지하고속도로(North-South Corridor)를 13개 구역으로 나눠 발주했고 지하철과 마찬가지로 국내사는 쌍용과 현대, 삼성, GS가 참여 중이다. 2018년 공사를 시작해 2027년 준공 예정으로, 쌍용 현장의 공사금액은 각 4000억원, 5000억원 규모다.
쌍용건설이 맡은 공구 2곳 중 N102공구는 남쪽 구간 도심 한가운데 있는 1.57㎞ 구간이다. 21일 오전 찾은 현장은 고층 오피스 빌딩과 주거용 아파트, 통행하는 차들로 어수선했다. 공정률 30%로, 시점부는 지하도로의 천장이 될 루프 슬래브 작업이 콘크리트 타설까지 진행된 상황이었다. 벽과 천장을 올리고 그 아래 길을 뚫어 바닥을 완성하는 '톱다운(top-down)' 방식이다.
지하 길을 뚫어 나가는 건 지하철 공사와 비슷하지만, 위치조건상 새로운 난관이 있다. 우선 현장은 지하철 2개 노선(다운타운라인, 노스이스트라인)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지하 더 깊은 곳으로 지하철이 지나가고 그 위로 차량이 통과하는 지하도로가 깔리는 건데, 인접거리가 30㎝인 난구간도 있다고 한다. 그 사이사이 콘크리트 말뚝 50개를 박아야 하는데, 자칫 지하철이 물속처럼 위로 '둥' 떠오르는 충격을 줄 수 있어 정밀한 측량과 경험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또 지하 도로가 1924년 지어진 식민지 시대 문화유산 엘리슨빌딩(Ellison Building) 지점을 통과하게 되는데, 지하를 안전하게 파는 건 물론이고 일부 시설을 공사 중 허문 뒤 다시 복원해달라는 주문도 포함됐다고 한다. 도심이다 보니 지하에 매립된 유틸리티(전기·통신·가스·오수구 등)를 안전하게 우회해야 하는 과제도 있다. 발주처인 육상교통청도 공사 현장 근처에 있어 철저한 감시의 눈도 따갑다. 길을 따라 대형 하수구를 신설해 연결하는 공사도 포함돼 있다.
난공사답게 현장PD는 '9호선 15㎝ 공사'를 담당했던 류동훈 상무가 맡았다. 먼저 방문한 톰슨동부해안선지하철 현장을 담당하다 2018년 말 공사 수주 직후 이번 현장으로 오게 됐다. 류 상무는 "난공사일수록 실제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많아 원가도 올라가는 편인데, 싱가포르 육상교통청이 현재 사업에 참여 중인 한국 건설업체 4곳을 좋아하고 신뢰한다"고 전했다. 전체 21.5㎞ 13개 공구 중 쌍용, 삼성, 현대 각 2곳, GS 1곳으로 한국업체가 절반 이상을 공사하는 셈이다. 공사 방식도 설계와 시공을 모두 하는 '디자인앤빌드(Design&Build)' 방식이다.
이날 오후엔 또 다른 현장인 북부 N111 공구도 찾았고, 다행히 전날과 달리 날씨가 맑아 야외 현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외곽 지역에 속하는 N111공구는 도심지하고속도로가 지상으로 나와 교량으로 이어지는 복합공종구간으로, 1.2㎞ 현장 안에 지하-지상-교량 3개 구간이 모두 있다. 윤영진 PD는 "공정이 완전히 다르면 사람도 2배 필요하고 설계도 2가지라 어렵고 싱가포르 규제환경상 일일이 허가를 받는 것도 복잡하다"면서도 "도심에 비해 유틸리티는 신경을 많이 안 써도 되는 건 장점"이라고 소개했다.
◇'해외건설 강자'…고급건축 기술 인정받고 신뢰 쌓아
이틀간 3곳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근무연차 10년 안팎의 한국인 실무 직원들이 현지 작업자들과 자유롭게 소통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 7만2000달러(2021년, 세계은행 기준)에 달하는 싱가포르 공사현장 인부 중 국적자는 보이지 않았고, 방글라데시와 말레이시아, 인도, 필리핀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주를 이뤘다. 2년 전 군사 쿠데타 이후 어수선한 미얀마 기술자들도 최근엔 자주 보인다고 한다.
T308공구 현장을 함께 둘러본 과장급 공무팀 직원은 "입사하자마자 첫 현장으로 이라크 외곽 토목현장에 배치돼 5년간 공사 마치고 싱가포르에 왔는데 2027년 공사 마칠 때까지 있지 않겠느냐"고 했고, N111공구의 과장급 공사팀 직원은 "싱가포르에선 그래도 영어가 통하는데, 직전 인도네시아 현장에선 국적자가 다수인 현지 작업자들의 영어가 서툴러 직접 인도네시아어를 배워 소통했다"고 했다.
쌍용건설은 건설업계에서 전통적인 '해외건설 강자'로 통한다. 그중에서도 싱가포르는 중요한 거점인데, 현재 다른 국내업체들과 함께 진행 중인 토목공사에 앞서 이미 도시 개발 초기 단계에서 고급건축 기술을 인정받았다. 인어 몸통에 사자 얼굴을 한 채 물을 내뿜는 동상이 있는 머라이언공원(Mer-lion Park)에 서서 건너편 마리나베이샌즈호텔 사진을 찍는 건 어느덧 싱가포르 방문 상징이 됐다.
올해 2월에는 두바이에서 초특급 호텔 '아틀란티스 더 로열'을 완공해 또 다른 세계적 랜드마크 기대를 얻고 있다. 동남아시아와 중동을 넘어, 아프리카 적도기니에서 활약하고, 최근엔 중남미 진출을 타진 중이다.
류동훈 상무는 "1992년 입사 당시에도 쌍용건설에 해외현장이 많아 지원했고 인도 등 16년째 해외 생활 중인데 후회한 적도 없고 청년들에게도 해외근무 경험을 꼭 쌓아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건설업은 기술 수준이 세계 선두권인데 국내 인프라 수요는 한계가 있어 해외 진출이 꼭 필요하다"면서 "동남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나 우크라이나 재건사업 등 신규시장을 계속 열고, 아국업체들이 같은 공구를 두고 서로 저가 경쟁하는 게 아니라 전략적으로 상생할 수 있도록 정부도 지원해 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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