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철수가 낳은 기적 ‘김치 5호’ [심층기획-정전 70·동맹 70주년]

박유빈 2023. 7. 27.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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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필씨가 전하는 ‘그날’
1950년 성탄절 피란선서 출생
5번째로 태어나 ‘김치5호’ 애칭
당시 배에서 출생한 5명 중 1명
“北에 남은 가족들에 피해 갈까봐
부모님, 상봉 신청 한 번도 안 해
남북 평화롭게 살길 기대” 밝혀

“제가 김치 5호입니다.”

경남 거제에서 수의사로 일하는 이경필(73·사진)씨는 자신에게 평생 따라붙은 별칭을 자연스레 소개했다. 이씨는 1950년 12월 피란민 1만4000여명을 싣고 북한 함경남도 흥남에서 거제도로 철수하던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통에 ‘흥남철수작전’으로 배에 탈 때는 어머니의 몸속에 있었지만, 성탄절에 선물처럼 세상에 나왔다. 배가 출발한 지 사흘째였다.
당시 배에서는 이씨를 포함해 5명의 아이가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왔다. 이씨는 그중 막내인 다섯 번째 아이였다. 로버트 러니 메러디스 빅토리호 사무장은 한국을 상징하는 김치로 배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애칭을 지어줬다. 다섯 아이 중 ‘김치 1호’는 손양영(73)씨로 연락을 하고 지낸다. 지금은 동네 동물의 건강을 돌보며 보통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의 출생이야기는 이처럼 특별하다.

6·25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하루 앞둔 26일 이씨는 세계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릴 때부터 들었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의 출생 상황을 전하고, 북에 두고 온 할머니를 평생 그리워했던 아버지를 보면서 전쟁의 비극과 참담함을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15∼26일 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이 북진을 멈추고 함경남도 흥남을 통해 한반도 남쪽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북한에 진입한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앞세워 국군과 유엔군을 압박하며 전세가 역전됐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대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가까스로 중공군 포위망을 뚫으면서 철수작전이 가능해졌다.
6·25전쟁 도중인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국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올라탄 피란민들 모습. 함경남도 흥남에서 경남 거제까지 사흘에 걸친 항해 동안 이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탄생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국군 및 유엔군 장병은 물론 10만명 이상의 민간인이 흥남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탈출했다. 작전에 동원된 미 군함 및 화물선은 피란을 원하는 민간인을 한 명이라도 더 태우고자 무기와 군수물자를 바다에 던져 버린 것으로 전해진다. 군 병력이 철수하기도 부족한 군함에 미군의 도움을 구해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불러 1만4000여명의 피란민이 피란할 수 있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피란민을 구출했다는 기록을 가진 흥남철수작전의 도착지는 경남 거제였다. 당시 작전에 관여한 에드워드 포니 미 해병 대령의 손자 네드 포니는 2020년 흥남철수작전을 “20세기 최대의 인도주의적 사건”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당시 배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모(문용형·강한옥)도 몸을 실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씨의 부모는 곧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배에 올랐다. 이씨 부친은 북에 어머니와 이모, 이모부 등을 놓고 왔다. 이씨는 “명절에 차례를 지낼 때마다 (할머니가 그리워) 아버지가 많이 우셨다”고 마음 아파했다. 그는 “할머니는 미군이 점령했던 동네에 인민군이 돌아오면 아들이 죽임을 당할까 봐 일주일만 피해 있으라며 아버지를 피란 보내셨다”면서 “그게 영원한 이별이 됐다”고 말했다. 할머니와 함께 고향에 남은 이모와 이모부는 혹시나 찾았다가 역으로 피해가 돌아갈까 봐 이산가족 상봉 신청은 꿈도 안 꿨다. 이씨는 “우리가 피란 와서 북에 남은 가족에게 제재가 갈 것을 우려해 부모님께서 면회 신청을 한 번도 안 했다”고 전했다.
‘김치 5호’ 이경필씨의 가족 사진. 가운데 작은 아이가 이씨. Kimchi5평화·통일연구회 옥영태 대표 제공
이씨 부친은 이씨가 군인이나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다. 이씨는 “남북 교류가 활발해지거나 통일이 되면 북에 가장 먼저 갈 수 있는 직업이라 그랬을 것”이라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동물을 가까이에서 보며 수의학과에 진학한 이씨는 학군단(ROTC)에서 복무를 마친 뒤 거제에서 ‘평화가축병원’을 차렸다. 상호명은 아버지 뜻에 따랐다. 북에서 사진관을 운영했던 이씨 부친은 피란길에 카메라 2대만 딱 챙겼는데 이걸로 거제에서 ‘평화사진관’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이씨는 “아버지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남북이 평화롭게 살았으면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곤 했다”며 “꼭 ‘평화’를 넣어 짓길 바라셨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이씨의 모친은 ‘평화상회’, 형은 ‘평화식당’ 주인이 됐다.

흥남에서 함께 피란 온 1만4000여명에게 이씨는 애틋함을 품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어머니가 배에서 출산할 때 저를 받았던 분의 손녀를 거제에서 만난 적도 있다”며 “부모님으로부터 그 좁고 열악한 상황을 많이 들었는데 캐나다로 이민을 간 산파의 손녀를 찾아가지는 못하고 거제에서 만나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고 했다. 이씨는 “북한 정권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기에 우리 스스로 자주국방은 해야 한다”면서도 “여전히 북한에 굶는 사람이 많다 하는데…. 아무튼 한민족인데 우리가 북한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6·25전쟁이 휴전된 지 70년이 됐지만 이씨에게 미군은 여전히 생명의 은인이다. 한·미동맹 기념행사나 흥남철수작전 관련 자리에 참석해온 이씨는 1950년 피란을 지원한 미군이나 가족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그가 직접 미국 땅을 밟은 적은 두 번이다. 그는 “‘아, 흥남’이라는 영화 촬영과 한·미동맹 60주년 기념행사 참석을 위해 갔었다”며 “한·미동맹 60주년으로 방문했을 땐 장진호 전투 당시 미10군단 부참모장으로 흥남철수작전을 지원한 포니 대령 가족과 미재향군인회에 감사패도 전달했다”고 밝혔다.

방문 당시를 떠올리며 잠시 말을 멈췄던 이씨는 “장진호 전투 용사를 만났더니 나를 보고 그렇게 울더라”며 “‘전투 때 동료들이 반쯤은 얼어죽은 기억이 나는데 그 덕에 우리는 피란 와서 이렇게 살아 있다’며 많이 울었다”고 회상했다. 이씨는 “돌아가시기 전 부모님도, 저도 늘 미군이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을 막아주고 흥남부두에서 피란을 도와준 덕에 살았다고 생각한다”며 “그때 피란 오지 못했으면 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구출된 극적인 인도주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씨는 “아버지 말대로 남북이 평화롭게 살면 좋겠다”며 “다시 총부리를 겨누고 핵 개발하는 일 없이 한민족이 단합해서 살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박유빈·구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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