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전략 격전지된 남태평양…한치 양보없는 외교전쟁 왜 벌어지나[딥포커스]
美, 태평양 지역 특성 무시한 채 '뒷북 구애' 한다는 지적도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냉전 시대 이후 주목받지 못하던 남태평양 섬나라들이 미중 간 경쟁의 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인도·태평양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 등 동맹국들 간 대결에서 이들 작은 섬나라들은 양쪽 모두에 전략적 요충지가 된다.
또한 도서 지역이라는 특성상 적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유엔 내에서 동등한 투표권을 행사한다는 점, 미국 본토의 3배에 달하는 바다에서 어업과 해저 광물 탐사 활동이 가능하다는 점 등도 이들 국가의 매력 포인트로 꼽힌다.
26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남태평양 순방에 나선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날 통가를 찾아 시아오시 소발레니 통가 총리와 회담을 가졌다. 미 국무부 장관이 통가를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블링컨 장관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온 중국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소발레니 총리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이 지역에서 중국의 관여가 점점 커지며 약탈적 자금 조달, 남중국해의 군사화, 다른 국가의 주권을 훼손하는 투자 등 우리의 관점에서 점점 더 문제가 되는 행동이 늘고 있다"며 "미국은 (통가의) 강력한 파트너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태평양 지역 공들이는 中…솔로몬제도와 전략 동반자 관계 수립
블링컨 장관이 직접 중국을 겨냥하고 나선 데는 최근 중국의 공세적인 인도·태평양 지역 영향력 확대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10일 머내시 소가바레 솔로몬제도 총리를 만나 양국 간 전면적 전략동반자 관계 수립을 공식 선포했다.
본래 대만과 수교하던 솔로몬제도는 소가바레 총리 취임 이후인 2019년 9월 대만과 교류를 끊고 중국과 수교해 왔다.
중국은 지난 10년 동안 남태평양 지역에 공을 들이며, 호주에 이어 태평양 섬나라들과 가장 교류가 많은 나라에 이름을 올렸다. 태평양 섬 국가에 대한 중국의 직접 투자는 2013년 9억 달러에서 2018년 45억 달러로 400% 증가했다. 중국 기업들은 지난 20년 동안 태평양 광산에 2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중국과 태평양 제도 간의 총 수산물 무역은 3500만 달러에서 1억1200만 달러로 늘었다.
특히 지난 3월에 중국과 솔로몬제도 간 양자 안보 협력 협정 초안이 유출되며 서방의 우려가 불거졌다. 협정 초안에는 중국이 솔로몬제도에 선박, 물류 교체, 기착을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영구적인 군사 기지를 세울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겼다. 솔로몬제도는 미국의 동맹국인 호주와 2000㎞도 채 떨어지지 않았다.
◇中 '일대일로' 핵심 요소…냉전 시대까지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
중국이 이처럼 태평양 지역에 공을 들이는 데는 태평양 섬나라들이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꼽히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는 이 지역을 아시아와 중남미를 연결하는 소위 '에어 실크로드'의 중요한 항공 화물 허브로 보고 있다. 중국은 이러한 인식을 방증하듯 지난 2021년까지 외교 관계를 수립한 10개 태평양 섬 국가와 일대일로 협력 문서에 서명했다.
태평양 섬나라들을 도련선(island chain), 즉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 위해 설정한 가상 군사방어선으로 삼던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의 남하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2차 세계대전 당시 과달카날 전투가 벌어졌던 솔로몬제도는 태평양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냉전 시대까지 주목받았다.
중국의 태평양 지역 진출에 바이든 행정부도 올해 들어 더 발 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은 지난 1월 30년 만에 솔로몬제도에 대사관을 재개설한 데 이어 몰디브에 새 대사관을 설립하는 계획을 마무리 중이다. 또 통가와 키리바시를 포함한 태평양 섬에 새 대사관을 여는 것을 논의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카멀라 해리스 미 부통령은 대사관 설립 계획을 발표하면서 "여러분(태평양 도서국)은 마땅히 받아야 할 외교적 지원과 관심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그것은 곧 바뀔 것"이라고 예고했다.
◇美, 태평양 지역 특성 무시한 채 '뒷북 구애' 한다는 지적도
일각에서는 미국의 태평양 지역에 대한 구애가 '뒷북'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호주 싱크탱크 로위 연구소의 동아시아 선임 연구원 리처드 맥그리거는 폴리티코에 "서방 동맹국들은 중국과 같은 지역 강대국을 태평양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 싱크탱크 미국외교협회(CFR)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새로운 안보 협정과 미국의 이익에 대한 잠재적 위협에 대한 수사법과 이 지역에 대한 새로운 참여 전략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며 "미국은 1993년 솔로몬제도에 있는 대사관을 폐쇄하며 이 지역을 무시한 반면 중국은 영향력을 늘렸다"고 평가했다.
이어 "솔로몬제도에 대사관을 다시 열고 태평양 지도자들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계획은 좋은 출발이지만 충분하지 않다"며 "미국은 이 지역에서 신뢰할 수 있는 입지를 재정립하고, 중국의 재정 자원에 대한 대안을 제공하기 위해 지역 동맹국, 파트너 및 민간 부문과 협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차 일본을 방문하던 중 부채한도 협상을 위해 조기 귀국을 결정하며 파푸아뉴기니 등 해외 순방 계획을 취소했다. 이를 두고 바이든 행정부가 외교보다는 국내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WP는 "블링컨 장관은 바이든 대통령을 대신해 파푸아뉴기니를 방문했는데, 이는 이 지역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려는 미국의 노력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中의 '부채 외교'…태평양 국가, 발 빼기 쉽지 않을 듯
이뿐만 아니라 중국의 '대출 프로그램' 때문에 태평양 도서국들이 중국의 손을 놓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은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에 항구나 도로를 건설할 투자 자금을 빌려주는 대신 해당 국가가 채무를 변제하지 않으면 항구나 도로 사용권을 받고 있다. 스리랑카는 중국에 돈을 빌려 함반토타 심수항을 건설했지만, 재정 수입을 부채를 갚는 데 투입하다 끝내 항구를 중국에 넘겼다.
그 금액만 5000억 달러(약 650조원)가 넘으며, 코로나19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개발도상국들은 채무 불이행(디폴트) 가능성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부채 외교' 대상은 통가가 대표적이다. 통가는 지난 2006년 민주화 시위 중 폭동이 일어난 뒤 황폐해진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중국에 손을 벌렸다. 현재 통가의 대외 부채는 4억3000만 달러(약 5500억원)에 달하며, 이 중 3분의 2는 중국에게 빚지고 있다.
통가는 기후 변화, 글로벌 공급망 붕괴, 팬데믹 등으로 정부 재정 건전성이 악화하며 상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누아투도 대외 부채 절반을 중국에 지고 있고, 파푸아뉴기니도 중국에 대외 부채의 25%인 5억9000만 달러(약 7500억원)를 빚지고 있다. 이 때문에 태평양 도서국들이 해수면 상승으로 가라앉기 전에 중국의 빚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이 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넘기 위해서는 대사관을 개설하는 것 외에 실질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제언도 나왔다.
WP는 "투발루와 키리바시 같은 국가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국가들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이들 국가는 점점 증가하는 도전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서방 국가들의 더 많은 투자 유치를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통가 언론인 테비타 모툴랄로는 WP에 "중국인들은 사회, 스포츠, 금융 등 모든 분야에 참여하고 있다"며 "실행 가능한 대안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그들과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뉴질랜드 매시 대학교 선임 강사 안나 포웰도 "문화적인 상황에 맞게 정부와 교류할 수 있는지는 미국의 외교가 태평양 지역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용할지 결정할 것"이라며 "대사관을 여는 것뿐만 아니라 외교가 실행되는 방식도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yeseu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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