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달이 ‘마통’ 끌어 쓴 정부… 한국은행 사금고화에 커지는 ‘우려’

세종=박소정 기자 2023. 7. 27. 06: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세수 부족’에 매달 세입세출 미스매치 겪는 정부
‘한은 차입 87兆·재정증권 27兆’로 돌려막기 해
‘재정증권 우선’ 원칙에도 2년째 한은 차입 과다
인플레·투명성 문제 불구… 정부 “자금경색 고려”
“하루빨리 세수 대응안·국채 발행 계획 밝혀야”
“정부는 일시적 부족 자금을 한은으로부터 차입하기에 앞서 재정증권 발행을 통해 조달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정부는 한은으로부터의 일시 차입이 기조적인 부족 자금 조달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한국은행의 대정부 일시 대출금 부대조건

올해 들어 정부가 한국은행에서 빌린 일시 차입금이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금이 충분히 걷히지 않으면서 예산을 집행할 자금이 부족해지자 한은에서 임시로 끌어다 쓴 돈이 늘어난 것이다. 빈도도 잦아졌다.

정부의 이런 관행은 과거 문제로 지적되며 법 개정으로 이어진 바 있다. 지난 2016년 ‘한은 차입’ 대신 또 다른 단기 차입 자금원인 ‘재정증권 발행’을 우선시하도록 국고금 관리법이 개정됐다. 그런데 이런 원칙이 다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정부가 한은을 ‘사금고’(私金庫)처럼 쓰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27일 기획재정부·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정부가 한은 차입과 재정증권 발행을 통해 일시 차입한 규모는 총 113조7000억원에 달한다. 이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대응으로 긴급 재정 지출이 필요했던 2020년 ‘한해’ 규모(148조2000억원)에 근접한 수준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달 15일 오전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비상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뉴스1

◇ 올해 벌써 한은서 87兆 빌린 정부 “원칙 훼손”

정부의 일시 차입은 세입과 세출 규모가 일시적으로 맞지 않을 때 단기로 자금을 융통하는 것을 일컫는다. 방법은 ‘재정증권 발행’(63일)과 ‘한은 차입’(15일) 등 두 가지다.

재정증권은 금융 시장에 발행하는 유가증권으로 국채의 한 종류다. 한은 차입은 말 그대로 정부가 직접 한은으로부터 돈을 꾸는 방식이다. 재정증권 발행에 비해, 한은 차입은 일정 한도 내에서 ‘마이너스통장’(마통)처럼 돈을 빼서 썼다가 채워 두기만 하면 돼 정부 입장에선 간편하다.

최근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한은 차입금이 너무 많이 불어났다는 점이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한은 차입 누적 규모는 87조2000억원에 달했다. 역대 최대를 기록한 2020년(102조9000억원)에 이미 근접한다.

정부는 한은으로부터 매달 돈을 빌렸다. 금액은 ▲1월 3조5000억원 ▲2월 16조5000억원 ▲3월 28조1000억원 ▲4월 17조1000억원 ▲5월 6조1000억원 ▲6월 15조9000억원이었다.

일각에서는 한은의 대(對)정부 일시 차입 증가가 ‘통화량 증가’와 같은 효과를 내 물가를 자극하고, 한은의 통화신용정책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이유로 미국은 재무부가 중앙은행인 미 연준(Fed·연방준비제도)으로부터 직접 차입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공개 시장 거래를 통해서만 자금을 조달한다.

그래픽=정서희

◇ ‘재정 투명성·인플레 부작용’ VS ‘자금 경색 고려’

현재 정부가 자금난을 겪는 것은 세수 부족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는 전반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고 반도체 산업도 호황을 누리며 세금이 많이 걷혀 자금 부족 문제를 겪지 않았다. 그러다 코로나19가 확산한 초기에는 자금난을 겪으며 일시 차입을 확 늘리기도 했다. 이때도 재정증권 발행보다 한은 차입이 많았던 문제가 있었다.

재정 전문가들은 ‘정부의 한은 사금고화’ 관행이 먼저 투명성 측면에서 문제가 된다고 지적한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는 국민에게 재정 상태에 대해 잘 알리고 통제받을 필요가 있는데, 그걸 ‘재정의 책무성(accountability)’이라고 한다”며 “그런데 우리나라처럼 중앙은행 차입을 하면 어떤 상태인지 정보를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실제로 정부가 한은으로부터 얼마나 차입했는지는 매년 3월 발표되는 전년도 ‘연차 보고서’를 통해 뒤늦게 알 수 있다.

우 교수는 “돈이 안 들어와서 재정증권으로 빌려 쓰면, 국회도 그걸 계기로 국가의 수입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돼 대응하는데, 지금 정부는 건전재정을 내세웠으니 돈 빌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 같다”며 “대신 손쉽게 한은에 손을 벌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물가에 미치는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점도 주요 문제로 지적된다. 특히 최근에는 물가 상승이 경제의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상황인데 한은 차입이 늘어날 경우 통화량 증가와 비슷한 효과가 있어 물가를 자극할 우려가 있다.

정부는 한은 차입 기간이 15일 정도에 불과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우 교수는 “한번만 쓰고 갚으면 상관이 없는데, 보름 쓰고 또 보름 쓰고 또 보름 쓰는 게 지속되고 있지 않느냐. 계속 돈 찍어서 쓰는 건 매한가지”라고 했다.

2021~2023년 월별 한국은행 일시차입액 및 상환 추이.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 제공

정부는 한은 차입을 늘린 이유로 자금시장 불안을 지목한다. 지난해 하반기 ‘레고랜드 사태’로부터 촉발된 자금 경색 문제로 금융위기 가능성까지 거론된 기억이 있는 것이 배경이다. 재정증권을 무작정 찍어내면 국채로 수요가 쏠리고 회사채 수요가 말라붙는 ‘블랙홀’ 악몽이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재정증권은 결국 국채인데, 시장의 소화 가능성 등을 감안하면 그렇게 무한정 찍어낼 수가 없다”며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우석진 교수는 “결국엔 하반기로 갈수록 국채 발행이 불가피한 상황이 될 것으로 본다”며 “정부는 세수 부족 상황이 심각하니 국채 발행 한도를 늘리거나 세출 감액을 하는 등의 방식으로 하루빨리 메꿔야 한다고 솔직하게 고백해야 한다”고 했다.

한 시장 관계자는 “만약 시기를 놓쳐 연말 국채를 시장에 한 번에 쏟아내면, 국채 조달금리가 치솟거나 시장의 자금을 모두 빨아들이는 경색 사태가 더욱 극심하게 벌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