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화가 임옥상, 그 손으로 위안부 추모공원 만들었다
범행 3년 뒤에 ‘기억의 터’ 설계
2016년 서울 남산 옛 통감 관저 자리에 ‘기억의 터’가 조성됐다.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이 한일강제병합조약을 체결하고 1939년까지 일제의 조선총독 관저였던 곳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기억하는 추모 공원을 만들어 메시지를 계승하자는 취지다.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과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조성 추진위원회가 중심이 됐고, 시민 1만9755명의 기부금이 모여 8월 29일 제막식이 열렸다.
그런데 이곳이 조성된 지 7년 만에 존폐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기억의 터’를 설계하고 작품까지 만든 이가 최근 미투 범죄로 법정에 선 화가 임옥상(73)씨라는 게 논란이 됐다. ‘민중미술계 거목’으로 활동해온 임씨는 2013년 8월 자신이 운영하는 미술 연구소 직원 A씨를 강제 추행한 혐의로 지난달 기소됐다. 임씨는 지난 6일 첫 공판에서 “순간의 충동과 잘못된 판단으로 피해를 줬다”며 혐의를 인정했고, 검찰은 징역 1년을 구형했다.
‘기억의 터’에는 임씨가 남긴 설계 의도가 동판에 새겨져 있다. “처음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를 일본 조선 침략의 교두보인 통감 관저 자리에 세운다는 것은 모욕으로 거부감까지 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전혀 다른 의표를 찌르는 탁월한 역발상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며 “그래서 새로운 지형을 구상했다”고 썼다. “근본 바탕부터 바꾸는 것, 땅의 형상을 전혀 새롭게 하자는 것이었다.” 동판엔 임씨의 서명과 사인이 남아있다.
임씨는 이곳에 ‘대지의 눈’과 ‘세상의 배꼽’이라는 작품 두 개를 만들었다. ‘대지의 눈’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을 새겼고, ‘세상의 배꼽’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를 한글과 영어·중국어·일본어로 썼다.
미술계에선 “자신의 연구소 직원을 위력으로 성추행한 범죄자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기리는 공공 조형물을 조성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하루빨리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술사가 황정수씨는 “친일 화가로 낙인찍힌 화가들의 표준영정도 죄다 교체하는데, 성추행범이 만든 작품을 남길 이유가 없다. 역사적 공간에 조성된 임옥상 작품은 모두 철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씨는 2016년 6월 ‘기억의 터’ 기공식 현장에 나타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여성이란 무엇인가, 상처란 무엇인가,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아이디어의 실마리를 잡았다”며 “피해자의 이름과 증언을 거울처럼 매끈한 오석에 새겨 시민들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읽을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성추행 후 3년 뒤 위안부 피해자 공원 설계
임옥상연구소 직원으로 일하던 피해자 A씨가 임씨에게 성추행을 당한 게 2013년 8월 일이다. 그러고도 3년 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공원을 설계하고, 대중 앞에 나서서 ‘작품 의도’를 발표했다. A씨의 변호인 김재련 변호사는 본지 통화에서 “피해자는 같은 미술계 종사자로서 강력한 힘을 가진 가해자가 반성하지 않고 대외 활동을 이어가는 걸 오랜 시간 뉴스로 보면서 깊은 분노와 두려움, 절망을 느꼈고, 임씨에게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 스스로 내적으로 강해져야 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며 “올해 2월 용기를 내어 고소했다”고 했다. 공소시효 만료를 한 달 앞두고 지난 6일 검찰이 징역 1년을 구형했고, 다음 달 17일 선고를 앞두고 있다.
◇나눔의 집,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작품이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도 임씨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기리며 만든 작품이 전시돼 있다. 하반신을 땅에 묻고 두 손으로 대지를 딛고 선 할머니가 축 처진 젖가슴을 드러내고 생각에 잠겨있는 ‘대지-어머니’ 연작이다.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 전시에도 이 시리즈 작품이 나왔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3월 12일까지 열린 ‘임옥상: 여기, 일어서는 땅’ 전시다. 민중미술 계열 미술평론가 출신인 윤범모 당시 관장이 주도해 열린 개인전으로, 피해자 A씨가 경찰에 고소한 시점이 전시가 한창이던 2월이다. 미술관 관계자는 “임씨의 회고전을 서울관에서 여는 것이 성격상 맞지 않는다고 내부 학예직 반대가 많았지만 관장이 밀어붙여서 진행됐다”며 “임씨의 성추행 사실은 최근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했다. 한 미술계 인사는 “성추행범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기리는 작품을 만들고, 그 이미지를 앞세워 자신의 영욕을 채울 국립기관 전시 작품으로 내놓았다는 게 역겹다”며 “임씨가 남긴 공공 조형물이 전국 도처에 있지만, 무엇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기리는 작품은 당장 철거를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1970~80년대 민중운동에 참여했던 임씨는 18대,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다. 그가 그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촛불 집회 작품은 문재인 청와대 본관에 걸렸다. 미술평론가 정준모씨는 “여성 인권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을 반추해 보면 철거 외에는 답이 없다”며 “이런 일에 늘 불같이 일어나 입장을 밝히던 여성 단체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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