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콜롬비아가 배우려는 ‘이승만 농지개혁’

박종세 논설위원 2023. 7. 27.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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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유엔 참전 기념식에 참석하려 방한한 콜롬비아 대표단이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이 기적적인 한국 번영의 토대가 됐다”며 배우고 싶다고 했다. 세계 빈곤 국가에는 농가 1억호(戶)에 사는 5억명이 최빈곤층을 형성하고 있다. 콜롬비아를 비롯, 과테말라, 인도, 방글라데시, 필리핀, 남아공 등이 이런 나라들이다. 그래도 최빈곤층이 5억명에 그친 것은 몇몇 나라는 농지개혁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 맨 앞자리에 한국이 있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2차 대전 후 자유 진영과 공산주의 대결이 재촉했다. 북한이 1946년 사회주의 방식의 ‘무상몰수, 무상분배’ 농지개혁을 먼저 했다. 말은 무상분배이지만 북한 농민에겐 소유권이 없었다. 이 대통령은 “공산당을 막으려면 농지개혁을 빨리 해야 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1950년 3월, 지주가 평균 수확량의 150%를 보상받고, 농민이 같은 양을 5년간 분할 상환하는 농지개혁법이 공포됐다. 북한과 달리 우리 농민은 농지 소유권을 가졌다. 대한민국의 번영을 가져온 사유재산제 기틀이 마련됐다.

▶농지개혁으로 매년 양곡 약 478만석을 농민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게 되자, 자녀들이 학교에 진학했다. 1945년 136만명이었던 초등학생 수는 1955년엔 287만명으로 두 배로 늘었다. 중등 학생 수는 8.4배, 대학생 수는 10배가량 증가했다. 교육기관엔 농지개혁을 적용하지 않자, 지주들이 사학 재단을 만들었다. 1943년 39개였던 사립 중학교는 1953년 246개로 늘었고, 사립 대학교는 10개에서 49개로 늘었다. 농지개혁이 의무교육 강화 정책과 맞물리면서 획기적인 인적 자본 축적이 일어났다.

▶농지개혁 당시 지주들은 소유하고 있는 논밭을 내놓는 조건으로 정부에서 지가(地價)증권을 받았는데, 3개월 만에 전쟁이 일어났다. 지주들은 1만%가 넘는 초인플레 속에서 지가증권 가치가 떨어지자 팔아서 생활비로 썼다. 이를 신흥 기업가들이 사 모았다. 삼양·두산·선경·한국화약이 지가증권으로 일제(日帝)가 놓고 간 자산이나 기업을 사들였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농지개혁은 산업 주체 세력도 교체했다.

▶2차 대전 후 출발이 비슷했던 한국과 필리핀의 운명이 갈린 것은 지주 세력의 견제 탓에 필리핀이 농지개혁에 실패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남미 순방 때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획기적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의 업적으로 자유 민주 건국, 6·25 남침 극복, 한미 동맹과 함께 농지개혁이 빠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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