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서 탄약 580만t 출동대기...文이 불신한 유엔사, 유사시엔 우리 생명줄
“전시(戰時)에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강화하려고 유엔사 재활성화(revitalization)를 하는 것 아닙니까?”
지난 2019년 12월 청와대에서 열린 군 수뇌부 격려 오찬 행사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최병혁(현 서울안보포럼 이사장) 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작권(전시 작전통제권)의 한국군 전환 이후에도 미국이 강화된 유엔사(유엔군사령부)를 통해 전작권을 계속 행사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담긴 질문이었다. 이에 최 전 부사령관은 “유엔사 재활성화와 작전통제권 강화는 관계가 없고 사실과 다르다”고 답변했다. 유엔사 재활성화는 17회원국으로 구성돼있는 유엔사가 미국을 제외하곤 사실상 유명무실화한 것을 보완하기 위한 미군의 프로그램이다. 지난 2006년쯤 시작돼 2014년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 미군 사령관 시절 공식화됐다.
◇“당신이 한국군이냐, 미군이냐?”
최 전 부사령관 등 일부 군 관계자들의 노력에도 유엔사 재활성화에 대한 문재인 정부 핵심 관계자들의 불신과 견제는 정권 내내 계속됐다. 앞서 2019년 7월엔 미국이 6·25전쟁 의료 지원국인 독일군 연락장교의 유엔사 파견을 추진하다가 우리 청와대와 국방부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남북 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문정인 전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2019년 9월) “유엔사가 말도 안 되는 월권을 행사한다”(임종석 전 대통령비서실장, 2020년 5월) “유엔사는 족보가 없다. 남북 관계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통제해야 한다”(송영길 전 국회 외통위원장, 2020년 8월) 등의 발언도 나왔다. 여기엔 문 전 대통령이 정권 말기까지 의욕적으로 추진한 ‘종전 선언’에 유엔사가 장애물이 된다고 판단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부 군 관계자가 청와대 등 정부 핵심 관계자들과 다른 의견을 밝히자 여러 형식의 압박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한 고위장성에게 ‘(당신이) 한국군이냐, 미군이냐. 별 네 개 달고 (미군에게) 그런 얘기도 못 하고 뭐 하는 거냐’고 힐난하는 취지로도 말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문 정부의 유엔사 견제와, 이에 따라 주한 미군 사령관(유엔군사령관 겸임)과 겪은 마찰은 지난해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의 입을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은 지난해 7월 미 워싱턴에서 열린 정전 선언 69주년 기념 ‘동맹 평화 콘퍼런스’에서 “(유엔사는) 아무도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더러운 작은 비밀(little dirty secret)’ 같았다”고 말했다.
◇유엔사 후방 기지는 유사시 우리 생명줄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은 콘퍼런스에서 “(문 정부와 마찰이 있어) 내가 믿을 수 있는 요원들을 (유엔사에) 투입했다. (부임 당시) 유엔사 본부에는 소대보다 적은 35명만 있었다”며 “이를 70명으로 늘리려는 것이 내 노력의 전부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에이브럼스 전 사령관은 2018년 9·19 남북 군사 합의 체결 두 달 만인 2018년 11월 부임해 남북 철도 연결 착공식을 비롯한 비무장지대 출입 등을 두고 문 정부와 여러 차례 심각한 갈등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면 유엔사는 정말 남북 관계와 통일의 장애물이고 우리 안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일까? 전문가들은 올해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유엔사의 성격과 역할을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유엔사는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일본 도쿄에서 창설돼 1957년 7월 서울 용산 기지로 옮겨온 뒤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미국·영국·호주 등 6·25전쟁 참전국 중심의 17회원국으로 구성돼 있는데, 평상시 정전 협정·체제를 유지, 관리하는 것이 주 임무다.
하지만 우리 안보 측면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다. 한반도 전면전 시 전력(戰力) 제공국들에서 병력과 장비를 받아 한미연합사의 작전을 지원하는 것이다. 유사시 전력 제공국의 병력·장비가 들어오는 통로가 요코스카 등 유엔사 후방 기지(주일 미군 기지) 7곳이다. 이들은 유사시 우리나라의 생명 줄과도 같은 존재다. 유엔 대북 제재 강화 이후 영국·호주·뉴질랜드·캐나다·독일 등 여러 나라가 함정과 해상초계기, 잠수함 등을 한반도 인근에 보내 북한 불법 환적 선박 등을 감시하고 있는데, 이 함정과 항공기들이 유류 등 보급을 받고 있는 곳도 유엔사 후방 기지들이다.
◇“세계 유일 장기 맞춤형 특별 안전보장 보험”
7개 유엔사 후방 기지는 미 해군기지 중 해외 최대인 7함대 모항(母港) 요코스카를 비롯해 요코다 공군기지, 사세보 해군기지, 캠프 자마(육군기지)등 일본 본토의 네 기지와 가데나 공군기지, 후텐마 해병대기지, 화이트비치 해군기지 등 오키나와의 세 기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요코스카엔 핵 추진 항모를 비롯, 이지스 순양함·구축함 10여 척이 상시 배치돼 48시간 내 한반도에 긴급 출동할 수 있다. 유엔사 군정위 수석 대표로 후방 기지들을 둘러봤던 장광현 예비역 육군 소장의 저서 ‘유엔군 사령부 인사이트’에 따르면 사세보 해군기지는 한반도 최근접 군수 지원 기지로 탄약 580여 만t, 유류 2억1100만 갤런이 비축돼 있다. 7함대 소속 함정 70여 척이 3개월간 쓰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양이다.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는 세계 최강 F22 스텔스기 등이 배치돼 있고, 북한 지역까지 1~2시간 내 출격할 수 있다.
장광현 전 군정위 수석 대표는 “유엔사 후방 기지가 없으면 한반도 유사시 전쟁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며 “유엔사는 유엔이 오직 대한민국을 위해 출시한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장기 맞춤형 특별 안전보장 보험”이라고 말했다. 중립국 감독위 스위스 대표로 여러 해 근무했던 거버 장군은 지난 2021년 2월 워싱턴 CAPS(아태전략센터) 세미나에서 “앞으로 지구상에 유엔사 같은 조직을 다시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정전협정 체결 이후 70년 가까이 유엔사가 존속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한국에는 정말 큰 행운”이라고 했다. 일각에선 향후 평화협정이 체결돼 정전 체제가 끝나고 평화 체제가 들어서더라도 유엔사의 명칭과 역할을 바꿔 존속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유엔사 한국군 참모 역할 확대 필요”
안광찬 한국-유엔사 친선협회 회장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유엔사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안광찬(전 군사정전위 수석 대표·예비역 육군 소장) 한국-유엔사 친선협회(KUFA) 초대 회장은 26일 정치권 및 사회 일각의 유엔사 해체론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안 회장은 유엔사가 해체될 경우 평시에 정전 관리를 위한 남북 군사 대화 통로가 없어져 전쟁 억제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또 일본에 있는 후방 기지 7곳도 설치 근거가 없어져 유지가 불가능해지면서 유사시 전쟁 지속 능력을 제공할 기능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무엇보다 한반도 전쟁 재발 시 국제적 지원의 근거인 유엔 차원의 집단 방위를 위한 새로운 유엔 안보리 결의안 채택이 중·러의 거부권 행사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며 “시리아 내전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유엔의 조치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안 회장은 유엔사의 미래와 관련해 “유엔사 참모들이 한미연합사와 주한 미군 참모를 겸직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해 적어도 유엔사의 기획과 계획, 군수 참모들은 단일 직무를 맡도록 해야 한다”며 “한국군 참모도 늘려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안 회장은 지난 5월 예비역 장성 등 사회 원로,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영리 민간 단체인 한국-유엔사 친선협회를 창립했다. 그동안 한미 동맹과 관련된 우호 협회는 많이 있었지만 유엔사와 친선을 도모하는 협회를 비영리 민간 단체로 만든 것은 처음이다. 안 회장은 “우리의 중요한 안보 전략 자산인 유엔사에 대한 민간 우호 단체가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해 협회를 창립하게 됐다”며 “민간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유엔사를 홍보하고 장병들을 격려하는 활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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