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 한 번도 꾸지 않은 꿈
원고지 15장. 분량을 원고지 장수로 안내된 의뢰를 받으면 나는 그것을 글자 수로 변환해야 하는데, 늘 그 짧은 과정이 넌더리가 났다. 산책부터 하자. 3일 만에 밖을 나와 걸었다. 무성히 자란 잡초들을 보자마자 강아지풀을 꼬아서 토끼 모양을 만드는 틱톡 챌린지가 생각났다. 두 대를 꺾어서 도전했는데 잎에 매연이 잔뜩 끼어서인지 토끼의 얼굴이 꾀죄죄했다. 대체 왜 이런 것까지 ‘챌린지’라 부르는 거지? 당장 내일이 마감일인데도 아무것도 쓰지 못한 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언제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 청소년 잡지에 짧은 글을 보냈더니 편집자가 추가 코멘트를 부탁했다. “제가요?” 나의 대답은 반사적으로 나온 비명에 가까웠다. 생각해보면 그 편집자가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비교육적이라도 좋으니까 본인이 시청하는 유튜브를 재미있게 소개해달라’고 청탁해서, 나중에 추려낼 생각으로 내가 보는 온갖 자극적인 채널들을 묶어 보냈는데, 그는 아무런 피드백도 주지 않고 그저 재밌다고 깔깔 웃기만 하며 글만 홀랑 가져갔다.
그러니 저 건전한 질문이 생뚱맞다 느낄 수밖에. 나는 호소했다. 편집자님. 저는 작가도 아니고, 작가의 꿈을 가져본 적도 없지만, 제가 아주 오래전부터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말한들 제가 추천한 유튜브 채널들이 세상의 모든 꿈과 희망을 위반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작가가 아니든지, 새로 유익한 채널을 추천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편집자가 또 한 번 깔깔 웃었다.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복길’님! 다 괜찮으니 작가라는 꿈이 없었다면, 그냥 ‘없었다’고 하시면 됩니다!”
편집자의 태도는 중학교 담임을 연상케 했다. “선생님은 ‘CLUB H.O.T.’예요.” 새 학기 첫번째 국어 시간. 담임은 자신이 H.O.T. 팬클럽 회원임을 선언했다. ‘어쩌라는 거야…?’ 뒤로 이어진 긴 침묵에 진땀이 날 때쯤 사분면이 그려진 용지가 모두에게 배달되었다. 왼쪽 상단에는 H.O.T.의 ‘환희’ 가사가 적혀 있었다. “남은 여백에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 구절을 자유롭게 쓰세요.” 각자가 좋아하는 노랫말로 문장의 수식구조를 분석하기. 그것은 우리의 새 학기 첫 국어 수업이자, 담임이 1년 동안 수행할 기똥찬 강의들의 샘플이었다.
담임은 모든 학생들에게 존대를 했다. “백일장에 참가할 학생은 수업 후 교무실로 와주세요.” 백일장이 자원이라니. 글짓기 대회란 자고로 문장에 소질 있는 학생이 교사의 추천을 받아 마지못해 나가는 것이 아니던가. 한창 담임의 K팝 국어 수업을 통해 문학적 용기가 생긴 나는 홀린 듯 교무실로 걸어 들어갔고, 단독 지원자로서 당당히 반 대표 작가에 선임되고 말았다.
“형식이 없네요.” 내 글을 읽는 담임은 낯빛이 어두웠다. 매콤한 첨삭을 기다리며 주눅이 들어 있는데 담임은 불쑥 “이대로 보냅시다”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뒤 담임이 나를 호출했다. 결과, 교내 본선 탈락. 하하 이제 쥐구멍을 찾으러 가보실까! 도망 갈 준비를 하는데 담임은 “뭐 어때요” 하며 대뜸 작은 선물 하나를 건넸다. ‘항상 엔진을 켜둘게’가 수록된 델리스파이스의 CD였다. 창피한 마음 때문에 그땐 제대로 느끼지 못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감동적이고, 중요한 순간이었다.
원고지 15장은 대략 2000자. 계산을 하다 문득 담임이 떠올라 간신히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요즘엔 부쩍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 선생님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 글이 바로 K팝 가사로 국어 수업을 진행하던 괴짜 교사가 꿈도 뜻도 재능도 없는 소녀에게 환상적인 실패를 경험하게 한 참혹한 결과임을 알려야 하는데. 당신이 전수해준 무모함으로 수많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고마운 사실도.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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