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의 눈] 국정원 ‘보이스피싱’

오창민 기자 2023. 7. 27. 03: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정전협정 80주년인 2033년 7월27일. 구보씨(65)는 아침 일찍 모처에서 김○○ 수사관을 만났다. 김 수사관은 구보씨의 신분을 확인하자마자 수갑을 채웠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오창민 논설위원

사건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북 간 군사 긴장이 고조되고, 지하차도 침수로 무고한 시민이 숨지면서 불안감에 밤잠을 설치던 구보씨.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받은 ‘심리 상담 센터’(0X0-0112-0113)에 전화를 걸었다.

“본 상담 전화는 국가가 무료로 지원하는 서비스입니다. 상담 전 고객님의 상태와 성향 등을 체크하겠습니다.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가 걱정되면 1번, 그렇지 않다면 2번을 눌러주세요.”

구보씨는 1번을 눌렀다.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항에 정박한 미군 핵잠수함에 탑승했습니다. 마음이 든든했다면 1번, 그렇지 않다면 2번을 눌러주세요.”

구보씨는 2번을 눌렀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안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된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면 1번, 그렇지 않다면 2번을 눌러주세요.”

구보씨는 역시 2번을 눌렀다.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이 추락했다고 생각하면 1번, 그렇지 않다면 2번을 눌러주세요.”

구보씨는 고민하다 2번을 눌렀다.

“경제에서 성장과 분배 가운데 성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1번, 분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2번을 눌러주세요.”

구보씨는 잠시 생각하다 2번을 눌렀다.

“윤석열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참석에 동행한 김건희 여사가 리투아니아에서 경호원 등 16명을 대동한 채 쇼핑을 했습니다. 김 여사가 호객 행위를 당해 어쩔 수 없이 가게를 들렀다고 생각하면 1번, 그렇지 않다면 2번을 눌러주세요.”

구보씨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2번을 꽉 눌렀다.

“윤석열 대통령의 장모가 법정구속된 사건을 보고 언짢았다면 1번, 그렇지 않다면 2번을 눌러주세요.”

구보씨는 역시 2번을 눌렀다.

“지금까지 답변으로 결과를 들으려면 1번, 응답을 수정하려면 2번을 눌러주세요.”

구보씨는 1번을 눌러 답변을 들었다.

“고객님은 정의롭고 자존심이 강한 스타일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정치·경제·사회적 여건과 고객님은 잘 맞지 않습니다. 세상과 시류에 순응하고, 독서나 등산 등을 하면서 조용히 기분 전환을 하기 바랍니다. 전문 상담원과 직접 통화를 원하면 1번을 눌러주세요.”

구보씨는 어이가 없었지만 호기심에 1번을 눌렀다. ‘여러분의 소중한 이웃이 전화를 받고 있으니 성희롱과 욕설을 삼가십시오’라는 기계음이 나왔다. 한참을 기다리자 상담원이 연결됐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구보 선생.”

구보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이 동해, 서해에 미사일을 쏴대고, 묻지마 칼부림으로 사람이 죽고 해서 걱정돼 상담 신청을 했는데, 세상에 순응하라니 무슨 말인가요.”

상담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가의 보도’ 같은 추가 질문을 던졌다. “구보 선생, 담뱃값과 버스요금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구보씨는 담배를 끊은 지 오래여서 담뱃값을 모르고, 교통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확한 버스요금도 몰라서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보이스피싱이라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끊었다. 알려준 적도 없는데 상담원은 구보씨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 이후 10년의 시간이 흘렀다. 댓글 조작과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등을 담당했던 국가정보원 김○○ 수사관은 사회의 불평·불만자를 적발해 ‘시국 사범’으로 만드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전화상담 서비스를 이용한 일종의 위장수사였다. 구보씨는 자신도 모르게 김 수사관의 100번째 제물이 돼 있었던 것이다.

<해설> 이 픽션의 배경은 국정원에 대공수사권이 잔존해 남용되는 가상의 대한민국입니다. 국정원법 개정으로 국정원 대공수사권이 내년 1월 경찰에 이관됩니다. 그러나 국정원은 시행령인 ‘안보범죄 등 대응 업무 규정’ 제정안을 최근 입법예고했습니다. 안보 공백을 막기 위해 ‘합동수사기구’ 등을 통해 대공수사에 참여하겠다는 것이 골자입니다.

오창민 논설위원 riski@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