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막지 싸움닭 시절로… 나 돌아갈래!
정상 지키려는 생각에 움직임 신중해져
국제대회 잇단 16강 탈락… 자신감도 뚝
“파이터 모습 찾자” 공격적 발차기 맹훈
여자 태권도 국가대표 이다빈(27·서울시청·67kg 초과급)은 20일 밤 훈련일지를 쓰면서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엄지척’ 사인을 보냈다. 오타니 쇼헤이(29·LA 에인절스)에게 ‘목표달성표’가 있다면 이다빈에게는 훈련일지가 있다. 이다빈은 울산 효정고 재학 시절부터 김민호 당시 코치(57) 제안으로 매일 훈련일지를 쓰고 있다. 김 코치는 이다빈에게 국가대표라는 꿈을 처음 심어준 인물이기도 하다.
이다빈이 2014년 고교생으로는 유일하게 국가대표로 뽑혀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 때도, 한국체대 재학 중 참가한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우승을 차지할 때도 훈련일지가 함께했다. 이제는 ‘직장인’이 된 이다빈이 9월 개막하는 항저우 대회에서도 우승하면 여자 태권도 선수로는 처음으로 아시안게임 3연패 기록을 남길 수 있다. 남자부에서 이런 기록을 남긴 것도 ‘미스터 태권도’ 이대훈(31·은퇴) 한 명뿐이다.
문제는 몸도 마음도 한창때 같지 않다는 점이다. 베트남 국가대표 선수단과 합동 훈련을 벌이던 20일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만난 이다빈은 “태권도 선수는 대개 25세 무렵 전성기가 온 이후 내림세를 걷는다. 어느새 대표팀에서 두 번째로 많은 나이가 된 데다 최근 대회 성적도 부진하면서 자신감을 많이 잃었다”고 털어놨다. 이다빈은 지난달 바쿠 세계선수권대회와 로마 그랑프리에서 연이어 16강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이다빈은 2021년 도쿄 올림픽 때 67kg 초과급 은메달을 차지하면서 한국 국가대표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다. 이다빈은 이 대회 준결승에서 당시 세계랭킹 1위 비앙카 워크던(32·영국)을 상대로 0.1초를 남겨 놓고 역전에 성공하며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 패한 뒤 금메달을 딴 밀리차 만디치(32·세르비아)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엄지척’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다빈은 “2, 3년 전만 해도 내 별명은 ‘파이터’였다. 상대에게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무자비하게 몰아쳤기 때문”이라면서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과거에는 도전자의 입장이라 무서울 게 없었는데 이제는 정상에 여러 번 서다 보니 ‘이 자리를 꼭 지켜야 해’라는 생각에 움직임이 신중해졌다”고 말했다.
이다빈은 또 “도쿄 올림픽 준비 당시 나보다 네 살 많았던 대표팀 언니 오빠들이 ‘몸이 예전 같지 않다. 너도 고관절, 체력 보강 운동을 미리 해둬야 한다’고 조언했는데 그때는 그 말이 와닿지 않았다. 이제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며 웃었다.
“국가대표 선발전 때도 ‘동생들에게 체력적으로 밀린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이다빈은 이전까지 손도 대지 않던 영양제를 하루에 여섯 알씩 챙겨 먹으면서 훈련일지를 통해 마음도 다스리고 있다. 이다빈은 “부족한 점이 90%고 잘한 점이 10%라도 잘했던 일을 일지의 맨 앞에 쓰고 있다. 나 자신을 칭찬해주면서 내가 나를 일으켜주기로 결심한 것”이라며 “내 칭찬을 쓸 때는 동시에 입으로도 소리 내 읽는다. 이렇게 하다 보니 긍정적인 생각들이 자라나고 마음도 젊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2008년 베이징, 2012년 런던 올림픽 2연패에 성공했던 황경선 코치(37) 역시 “자꾸 생각하지 말고 그냥 행동으로 옮기라”고 격려하면서 이다빈의 부활을 돕고 있다. 황 코치는 베트남 대표 선수와 연습 경기를 치른 이다빈이 오른발 앞돌려차기와 왼손 주먹지르기 등을 앞세워 14-1 완승을 거두자 “그래, 이제 이다빈답네”라고 소리치며 기운을 북돋아줬다.
이다빈은 “원래 내 모습까지는 아직 20% 정도밖에 못 온 것 같다. 아시안게임 3연패라는 타이틀에 욕심이 생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늘고 있다. 당장 눈앞의 아시안게임 목표만 보면서 달리다 보면 내년 파리 올림픽 정상으로도 이어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진천=강동웅 기자 lep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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