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나마 어머니 만나”… 이산가족 56명의 ‘그리운 얼굴’

파주=이소연 기자 2023. 7. 27. 03:02
자동요약 기사 제목과 주요 문장을 기반으로 자동요약한 결과입니다.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장남이 돼서 어머니 한 번 업어드리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었는데. 이렇게 그림 속에서나마 어머니를 업어드립니다."

그림 속 76년 전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심구섭 씨(89)의 손 끝이 떨렸다.

'그리운 얼굴' 전시가 17일 개막한 가운데 1세대 이산가족 심 씨는 어머니를 등에 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 '침묵의 강' 앞에 서서 70년 넘게 쌓인 그리움을 곰삭였다.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술가 56명, 1세대 이산 사연 듣고
회화-조각-사진 등 작품 만들어
정전 70주년 앞 파주서 전시회
“恨 달랠순 없지만 옛 기억은 남겨”

“장남이 돼서 어머니 한 번 업어드리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었는데…. 이렇게 그림 속에서나마… 어머니를 업어드립니다.”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만든 특별전 ‘그리운 얼굴’이 열리는 경기 파주시 한반도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에서 25일 심구섭 씨가 그림 ‘침묵의 강’에 담긴 자신의 어머니를 어루만지고 있다(왼쪽 사진). 심 씨는 76년 전 남동생을 데려오려고 북으로 떠난 어머니와 헤어졌다. 파주=안철민 acm08@donga.com
그림 속 76년 전 헤어진 어머니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심구섭 씨(89)의 손 끝이 떨렸다. 눈시울은 붉어졌다. 열세 살 소년은 백발이 됐지만 그림 속 어머니는 주름 하나 없이 고운 얼굴이다. “학교 잘 다녀오라.” 북에 두고 온 심 씨의 남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어머니가 다시 월북하던 날 남긴 마지막 말이다. 심 씨는 “그날 아침 일찍 일어나 교복을 다려 입혀주시고는 대문 밖에서 배웅해주시던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정전협정 체결 70주년을 이틀 앞둔 25일 경기 파주시 한반도생태평화 종합관광센터. ‘그리운 얼굴’ 전시가 17일 개막한 가운데 1세대 이산가족 심 씨는 어머니를 등에 업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작품 ‘침묵의 강’ 앞에 서서 70년 넘게 쌓인 그리움을 곰삭였다.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 근처 신상. 1947년 9월 부모와 함께 월남했지만 어머니는 심 씨가 강릉사범중학교에 첫 등교하던 날 남동생을 데려오기 위해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이 작품은 이만수 성신여대 동양화과 교수(62)가 2017년 심 씨에게서 사연을 듣고 석 달간 그린 것이다. 이 교수는 “그림 하나로 이산가족의 한을 위로할 순 없지만 그림을 통해 엇갈린 두 모자가 헤어지지 않고 함께 있는 순간을 염원했다”고 말했다.

이산가족 이경섭 씨의 어머니 사진을 모자이크 기법으로 만든 설치 미술 작품. 다음 달 20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에선 이산가족 56명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 60여 점을 볼 수 있다. 이한결 기자
다음 달 20일까지 무료로 열리는 이 전시는 조각, 회화, 사진 등 여러 분야 예술가들이 심 씨와 같은 1세대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기는 ‘그리운 얼굴 프로젝트’의 결과물 60여 점으로 구성됐다. 2017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와 1세대 이산가족은 현재까지 각각 56명. 팬데믹으로 2년 반 넘게 멈췄던 프로젝트는 이달 재개됐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단법인 ‘우리의 소원’의 하종구 상임이사는 “분단국가의 예술가로서 역할을 고민하다가 뜻이 맞는 이들과 힘을 합쳤다”고 말했다.

함경남도 북청군이 고향인 김명철 씨(87)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고향에 두고 온 어린 시절 추억을 찾았다. 21일 전화로 만난 김 씨는 고향 집을 떠나던 1950년 12월 7일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열네 살이던 그는 사이렌이 울린 뒤 대문 앞에서 어머니와 형에게 “일주일 뒤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쌀 주머니에 가족사진을 넣어뒀는데 설상가상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때 흥남부두에서 주머니를 도둑맞았다. 김 씨는 “도둑맞은 추억에 미련 갖지 않으려 일부러 속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았다”며 “차라리 남은 추억이 없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김 씨를 만난 이익태 작가(76)는 고향에서 학교 다닐 때 소고를 배웠다고 말하는 김 씨의 얼굴에서 천진난만한 미소를 포착했다. 그리고 손에 소고를 든 김 씨의 모습을 그렸다(작품 ‘심장의 북소리’). 김 씨는 그림을 보고 “고향의 기억을 모두 잊고 살아왔는데, 이제 이 작품 하나가 내게 남았다”고 했다.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실향민 윤일영 씨(87)도 22일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김서경 조각가를 만났다. 작품은 1년 뒤 완성될 예정이다. 윤 씨의 고향은 경기 장단군 장도면 오음리(미수복지구). 경기 연천군 경순왕릉 언덕 위 전망대에 서면 휴전선 너머 고향이 보인다. 그는 “고향 뒷산 지척에서 한 발자국도 다가서지 못한다”고 했다. ‘우리의 소원’은 이산가족과 실향민 250여 명의 사연을 작품으로 계속 만들어 전시를 열겠다고 밝혔다.

파주=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