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3조
코로나19 전, 꽤 오랜 기간 구에서 운영하는 체육시설에서 매트 필라테스를 했다. 집에서 가깝지, 가격도 싸지, 시설과 프로그램도 얼마나 다양한지! 동네 사람들 모두 애용하던 곳이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이곳에 오래 머무셨다. 셔틀버스를 타고 와서는 운동 조금 하고 목욕 길게 하고 여기저기 의자에 앉아 오래 담소를 나누시곤 했다. 특히 요즘 같은 무더위에는 에어컨 바람이 시원한 로비를 좀처럼 안 떠나셨다.
내가 다닌 매트 필라테스는 할머니들이 많았다. 거울과 가까운 맨 앞 가운데는 선생님 자리이고, 그 앞으로 비껴가며 네 줄 정도 회원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수업 시간 전 선생님 자리에 공용 매트 하나를 누군가 깔고, 각자 공용 매트 혹은 개인 매트를 갖고 와 자리를 잡는 방식이었다. 각 줄과 위치는 나름의 메시지가 있다. 맨 앞줄과 둘째 줄은 운동에 자신이 있거나 오래 했거나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이른바 ‘고인물’이라고 하는 터줏대감들이 차지하는 줄인데, 내가 다닌 곳에서는 이분들이 선생님을 향해 W자 대형으로 첫 줄과 둘째 줄에 자리했다. 셋째 줄이 무색무취한 편이라면, 선생님과 거리가 멀고 뒤에 아무도 없는 넷째 줄은 ‘나는 초보 혹은 절대 그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다’는 기운을 뿜는 사람들이 주로 차지한다.
처음 운동을 시작했을 땐 나도 넷째 줄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모든 운동에 젬병이라 운동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운동이 몸에 익자 매트에서 구르는 동안엔 남 볼 여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다면 선생님 동작도 잘 안 보이는 뒷줄에 있을 이유도 없겠다 싶어 앞줄로 슬슬 옮겨갔다. 그러다 W자 대형의 터줏대감 할머니들의 영역을 침범하게 됐다.
사실 이 침범은 좀 의도적이었다. 할머니들은 매트를 미리 깔아 친구 자리를 잡아 놓기도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여기 여기는 누구 자리라는 규칙이 있었다. 대부분 암묵적으로 이를 알기에 굳이 침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게 왠지 맘에 안 들어서 도발해본 것이다. 내가 한 자리를 차지하자 바로 뒤통수가 따가웠다. 속닥속닥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모른 척, 한동안 W자 대형의 여기저기를 침범하며 뻔뻔히 운동했다. 반 분위기를 좌우하는 터줏대감 할머니들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었다.
이러고 도발을 하긴 했어도 이분들이 나쁜 분이라 생각하거나 싫어했던 건 아니다. 이분들은 사실 몹시 다정한 분들이기도 하다. 당신 친구가 어느 날 운동을 안 오는 이유도 다 꿰고 있다. “이번주 손주 봐줘야 한대.” 합당한 이유도 없는데 빠지면 잡으러 가시기도 한다. 그중 대장 격인 할머니는 인심도 좋으시다. 운동 끝나면 친구분들을 몰고 가 칼국수 회식도 하시고, 봄이면 꽃구경도 가신다. 이분들 얘기를 듣노라면 계절 가는 것도 알 수 있다. “어제 시누네 밭에 가서 감자 캐왔잖아.” “시골에서 고춧가루 샀는데, 이번 거 참 좋더라.” 김장철이면 한 번씩 앓으시기도 한다. 요새 누가 김치를 담가 먹냐고, 사 먹으라고 서로 타박을 하다가도, 사 먹는 김치 맛없어 못 먹겠다고 하면 그건 또 그렇지 하면서 노동의 수고와 맛을 나누신다.
비록 이 할머니들께는 인사 한번 건넨 적 없고 자리까지 침범하는 왕재수였지만, 이분들의 수다는 좋아했다. 사람 사는 느낌이 나서 그랬다. 텃세도 가끔 부리지만, 자기 관리 열심히 하시며 당신들끼리 정감도 나누는 따뜻한 분들이셨다. 하긴 그게 인간 아닌가. 우리는 이런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을 이해하려고 역사를 공부한다. 그래서 역사를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명심해야 한다. “역사가 선악과 호오를 가르는 데 그치면 안 된다. 인간은 복잡하다.” 이것이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3조다.
장지연 대전대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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