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순수성을 회복할 위대한 가치

경기일보 2023. 7. 27.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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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아타 사진작가

소설 ‘구토’는 사르트르의 실존이다. 문의 손잡이가 세균 덩어리로 묘사된다. ‘구토’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진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지구촌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인간은 바이러스처럼 인식됐다. 인간 세상은 황망했다.

멀미는 고통스럽다. 뱃멀미는 배가 움직이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려는 몸의 반작용에서 시작된다. 평형 기능의 상실 때문이다. 멀미에 장사 없다. 위대한 사상가도, 빨래판 같은 식스팩을 자랑하는 헬스보이도 익지 않는 센 파도를 만나면 오장육부를 뒤튼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토해야 한다. 품위는 뒷전이다. 바다에 숙성되지 않는 존재감은 파김치가 된다. 구토의 존재감은 비릿하고 역겹다. 하지만 구토는 롤링하고 피칭하는 파도에 대응하는 정직한 몸의 철학이다. 순수의 시대다. 그러다 차츰 몸이 배의 움직임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내 몸이 배와 파도의 철학에 귀의한다. 멀미는 어느 날 봄눈 녹듯 사라진다.

시작은 뱃멀미와 같다. 순수했던 몸은 파도에 정직하게 반응했다. 그것이 멀미다. 구토다. 그러다 파도에 길들어 간다. 배와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종류의 파도에 익숙해진다. 몸이 배의 기울기에 익숙해지면서 멀미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반작용에 정직하게 반응하던 내 몸은 시나브로 타성에 젖어 멀미는 전설이 된다. 이제 나의 몸, 나의 철학이 좌로, 우로, 얼마나 기울었는지 알지 못한다. 설령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편향됐음을 알더라도 애써 외면한다. 구토의 시대, 순수의 계절은 죽었다.

배의 중심을 잡아주는 장치가 자이로스코프다. 배가 기울어도 자이로는 기울지 않는다. 팽이처럼 회전을 계속하려는 관성 때문이다. 팽이는 돌지 않으면 쓰러진다. 같은 원리다. 세상이 기울어도 자이로는 돌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자이로는 멀미다. 자이로는 멀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멀미를 버린 자이로는 자이로의 존재 이유를 버린 것과 같다. 그래도 지구는 돌듯이 돌아야 한다. 자이로의 평정심 때문이다.

사회의 자이로는 정치와 경제와 지켜야 할 룰이다. 셋 중 하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혼돈에 빠진다. 사회의 근간은 인간이다. 인간이 부와 권력에 경도되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자이로는 인문이다. 예술이다. 새의 한쪽 날개와 같다. 부와 권력에 함몰돼 평정심을 상실한 인간은 한쪽 날개가 꺾인 새처럼 추락한다. 부를 더 채우려고 평형수를 버린 배는 침몰했다. 들숨조차 고통스럽다. 토사물보다 더럽고 비역질보다 더 역겨운 것이 남았다. 인문과 예술로 위장한 패거리들이다.

물들었기 때문이다. 한 그물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프레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무리 지어 있기 때문이다. 무리를 벗어나면 내 밥줄이 위태롭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눈감아 주던 카르텔로부터 추방되기 때문이다. 손잡이만 봐도, 1도만 기울어도 구토하던 내 젊은 날의 초상, 나의 초심, 나의 순수, 나의 정의, 나의 자유, 나의 이상, 나의 의지, 자이로는 죽었다. 엿 바꿔 먹었다. 버림받은 자이로는 좀비가 됐다. 박물관 창고에 우글거린다.

당신의 자이로를 살려라! 엿 바꿔 먹었던 내 구토의 순수성을 회복해라! 인문과 예술은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하는 마지막 보루다. 위대한 가치다. 천년을 산 대나무로 죽비를 만들어 나를 쳐라! 

빨, 주, 노, 초, 파, 남, 보, 밤을 새우며 이상을 탐구하던 내 아름다운 시절로 가라! 구토해라!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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