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협정 70년 특집 다큐]판문점, 지켜지지 못한 약속
우리 땅인 동시에 우리 땅이 아닌 곳
한강변으로 난 자유로를 따라 한참을 달려, 철책 너머 임진강이 보일 때쯤이면 낯선 이정표 하나를 만날 수 있다. 바로 ‘판문점’이 표시된 이정표다. 그러나 판문점 이정표를 따라가더라도, 허가를 얻지 못한 일반인은 판문점에 도착할 수 없다. 판문점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엔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나라 국민 뿐만이 아니라 전세계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다. 판문점은 경기도 파주시에 소속되어 있는 우리나라 땅이지만, 이 지역에 대한 관리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맺어질 당시 협정 대상국에서 우리나라가 빠지게 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이 협정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땅인 동시에 우리 땅이 아닌 곳, 70여 년 전 판문점에서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정전 협정 초기 협상장은 개성의 내봉장
판문점은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을 멈추기 위한 정전협상이 열린 회의장소를 일컫는 이름이다. 1951년 7월, 협상 초기만해도 협상 장소는 개성 동북부에 위치한 내봉장이었다. 그러나 개성은 북한 지역이었고, 적진에서 협상이 이뤄지는 것을 연합군은 부담스러워 했다. 협상장 인근의 안전보장과 군사분계선 설정을 두고 맞서던 연합군과 공산군은 협상 시작 얼마뒤 협상 결렬을 선언한다.
그러나 연합군도 공산군도 전쟁이 계속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이에 연합군은 장소를 옮겨 협상을 이어갈 것을 제안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판문점이었다. 판문점은 미군 기지가 있던 문산에서 협상장이 있던 개성으로 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수시로 양측의 연락장교회의가 열리기도 했었던 이곳 판문점을 연합군은 새 협상장으로 제안한 것이다. 이후 공산군이 이를 받아들여 1951년 10월 말부터는 판문점에서 협상이 재개된다.
치열한 '고지전' 부른 합의... "정전협정 조인 시점까지 전투 계속"
판문점에서의 협상이 시작된 이후인 1951년 11월 27일, 양측은 가조인을 맺으며 협상에 큰 진전을 이룬다. 1) 38선이 아닌 군사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2) 정전협정이 조인되는 시점까지 전투를 계속한다는 원칙을 정한 것이다. 이 중 두번째 원칙은 정전협정이 맺어지는 순간까지 한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계속된 치열한 전투의 원인이 됐다.
접촉선, 즉 정전협정 조인 시점의 전선이 곧 군사분계선이 된다는 합의는 한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한 ‘고지전’을 불렀다. 판문점이 있는 서부전선에서는 전투가 많지 않았지만 산악지역이 많은 중부, 동부전선에서는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졌다.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지부장은 이 고지전에 대해 ‘고지를 뺏고 뺏기는 싸움을 했던 전투가 바로 고지전’이라고 설명했다. 하루 걸러 하루 씩 주인이 바뀌는 고지를 두고, 수없이 많은 시체를 봐야 했다. 때로는 동료의 시체를 쌓아 방벽을 만들면서 전투를 해야 했다. 류 지부장은 ‘당시에는 시체에 대한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라며, ‘오로지 살겠다는 욕망’ 뿐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국전쟁 당시 고지전을 통해 희생된 병사 수만 해도 300만 명이 넘는 걸로 추정된다. 한뼘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고지를 점령하고 죽어가야했던 전투가, ‘정전협정이 맺어지는 순간의 전선이 군사분계선이 된다’는 원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체제 경쟁 수단된 포로 송환 협상
정전협정이 쉽게 매듭지어지지 못한 이유는 또 있었다. 바로 전쟁포로 송환 문제였다. 당시 공산군 측은 포로들의 인도적인 송환에 대해 협의한 제네바 협약에 따라 모든 포로들이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연합군 측은 포로들의 자유 의사에 따른 송환 방식을 주장했다.
잡힌 포로는 본국으로 송환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이를 따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당시 미군이 제네바 협약에 있는 포로들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조항을 해석해 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물리적 전쟁에서는 이길 수 없는 상태였지만 이념전쟁에서는 승리해야 한다는 목표를 미군이 스스로 설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 10만 명이 넘는 공산군측 포로들에게 미군은 진영 선택권을 줌으로써 자유 진영으로 전향하는 포로들의 숫자를 늘렸다. 뿐만 아니라, 포로수용소 내에서 이념적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전갑생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에 대해 ‘미군이 스스로 포로들이 북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들이 북한을 전복하거나 또는,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사람으로서 북한을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미군의 이러한 심리전은 이념에 투철한 공산주의 포로들의 격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실제 수용소 내에서 포로들 사이에서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강도도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해졌다. 미군은 둘로 나뉜 포로들을 분리 감독할 필요가 생겼다. 친공산주의 성향의 포로들 중 의식화가 잘 되어 있는 장교급 포로들을 분리해 거제도 인근에 있는 봉함도나 용초도로 이송했다.
용초도에는 당시 포로들을 수용했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곳으로 옮겨진 포로들은 아침마다 ‘인민의 총칼을 받아보라’, ‘김일성 만세’를 외쳤다. 이곳에서도 포로들은 끊임없이 소요 사태를 일으켰고, 미군은 그럴 때마다 최루가스를 터뜨려가며 제압했다. 이렇듯 포로송환 문제는 2년 간의 정전협상 기간동안 가장 첨예하게 대립한 문제였다.
이승만, 정전협정 방해 않는 대가로 미국 원조 약속 받아
시간이 지나며 미국과 소련에서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952년 11월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정전협상은 새국면을 맞이했다. 1953년 4월에는 부상포로들이 판문점을 통해 교환되기 시작했다. 박태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는 ‘부상포로 송환이 한국전쟁 기간 중 가장 인도적인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부상포로 교환을 시작으로 양측의 정전협상은 급물살을 탔다.
그러나, 서울에서는 정전협정을 반대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대규모 시위가 연일 벌어졌다. 급기야,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정전을 코 앞에 둔 6월 18일부터 약 5일간, 2만 6천 명이 넘는 반공포로들을 석방해 버렸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특사까지 파견해 가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을 설득했다. 이승만은 협정을 방해하지 않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과 경제원조를 약속 받았다.
악수도 기념촬영도 없었던 10분 만의 조인식
1953년 7월 27일 10시, 판문점에서는 연합군의 해리슨 육군 중장과 북한의 남일 대장이 앉아 한국어, 영어, 중국어로 된 정전협정서에 서명을 했다. 두 사람이 협정서에 서명하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 서명이 먼저 끝난 북한의 남일 대장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조인식장을 빠져나갔다. 연합군의 해리슨 중장도 서명이 끝난 후 곧바로 일어나 조인식장을 빠져나갔다. 긴 협정을 기념하는 축하 인사도, 기념 촬영도 없이 2년 간의 정전협상은 그렇게 순식간에 막을 내렸다.
정전협정이 맺어진 지 70년의 시간이 흘렀다. 뉴스타파는 정전 70년을 맞아 판문점의 탄생과 그후 판문점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판문점’을 제작해, 올해 하반기에 공개할 예정이다.
뉴스타파 송원근 siskra@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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