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지키는 젠더혁신
[똑똑! 한국사회]
[똑똑! 한국사회] 이승미 |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나는 아플 때도 약 먹기를 주저하는 편이다. 감기로 쓰러지느냐 아니면 약 기운에 쓰러지느냐를 선택해야 하는 허약체이기 때문이다. 부작용을 자주 겪는 특이체질이라고 자신을 탓하며 살아왔건만, 알고 보니 내 몸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소아청소년과에서는 환아의 몸무게를 잰 뒤 약 용량을 정해 처방하건만, 종합감기약은 그렇지 않다. 의약품 개발 과정에서 고려하는 기본 모델은 대개 남성이다. 지금 내 손바닥 위의 타이레놀도 체중 70 ㎏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개발됐다. 그러니 ‘6시간마다 2정’이라는 성인 정량이 내게는 정량이 아니다.
약 한알이 과다복용인 사람이 나뿐일까? 과학기술은 논리정연한 과학전문가들이 합의한 방법론에 따르므로 객관적이고 공정하리라 여겨지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못하다. 자동차 머리 받침대와 안전띠가 대표적이다. 미국의 평균 성인 남성 기준으로 만든 더미 인형은 1997년까지 전세계 자동차 충돌실험에 사용되었지만, 다수의 실험으로 안전성이 검증된 자동차라 한들 정작 그 차에 타는 여성과 소아, 임산부의 안전까지 보장하기는 어려웠다. 배만 잡아주는 2점식 안전띠가 충돌 사고 때 태아 사망의 주요 원인임도, 에어백 위치가 아동에게 적정하지 않음도 많은 사고 후에야 알려졌다. 실제 충돌 사고에서 목뼈가 다칠 확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2배 높았는데,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자동차 머리 받침대 위치가 원인으로 지목됐다.
늘 여성이 불리하지만도 않다. 골다공증은 젊고 건강한 백인 여성을 기준 삼은 골밀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졌기에, 나이 많은 남성에게 노출된 위험 요소나 진단 기준은 제대로 정립돼 있지 않았다. 더욱이 골다공증은 완경한 여성이 겪는다는 사회적 인식 또한 남성 골다공증 환자의 진단이 늦어져 조기 치료를 어렵게 만든다. 생물학적 성차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성인 젠더 차이도 실생활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성차 연구의 필요성은 2005년 사학자 론다 시빙어 박사가 ‘젠더혁신’이라는 단어를 만들며 대두했다. 젠더혁신이란 성, 젠더 분석을 연구개발에 활용해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는 과정을 일컫는다. 유럽연합(EU)은 젠더 요소를 연구혁신 분야에 포함하도록 의무화했으며, 세계 3대 의학저널 ‘랜싯’은 성별 특성을 모든 의학 연구단계에 포함하고 성별·종족별로 데이터를 분석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다양한 조건이 고려되지 않은 제품 개발은 연구비 낭비로 귀결되기도 한다. 미국의 경우 1997~2000년 개발된 10가지 약품 중 무려 8가지가 판매 중지됐다. 사망까지 유발할 정도로 여성에게 부작용이 과다했기 때문이다. 한편 오늘날 승용차에 기본으로 장착된, 어깨와 허리를 묶는 3점식 안전띠는 볼보에서 만든 36주 임신부 더미 ‘린다’의 충돌실험으로 개발한 결과물이다. 젠더혁신이 새로운 시각과 사회 요구를 반영함으로써 기술의 가치를 높이고 많은 생명을 구한 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젠더혁신은 더욱 필요하다. 미국 표준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알고리즘 품질 개선을 위해서는 기계학습 데이터에서도 성과 인종의 다양성이 보장돼야 한다. 백인 남성 사진만 학습시킨 안면인식 인공지능은 유색인종 여성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심지어 흑인을 고릴라로 인식하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철학이 좋은 삶은 과연 무엇인지를 탐구해왔다면, 과학기술은 인간이 꿈꾸는 더 편하고 더 나은 삶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왔다. 과학기술에 젠더혁신은 절실히 필요하다. 젠더혁신의 명명자 시빙어 박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과 젠더를 고려해 연구하면 생명과 돈을 아낄 수 있다.” 젠더라는 단어만 접해도 거부감이 앞서는 선입견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존재한다. 하지만 젠더혁신연구를 페미니즘 사회운동의 일종으로 축소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젠더혁신은 현재의 과학기술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새로운 시각이자 유용한 도구이다. 우리 모두의 지속가능한 발전과 더 나은 삶을 위하여.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건설현장은 40도…사망한 노동자 본 의사 “온몸이 익었다”
- 지독한 2023 장마 끝…평년 2배 강수량에 극한호우 남기고
- 100명 살리고 하늘로…“나누는 삶” 좌우명대로 떠난 의인
- 허벅지까지 침수…잠든 80대 업어 구조한 ‘동네 경찰’
- 신림동 흉기난동 피의자 ‘33살 조선’ 신상 공개
- “전화마다 ‘사랑해요’ 하던 아들…” 채수근 상병 어머니의 편지
- “교사=예비 살인자” 윤건영 교육감 사과…질문 안 듣고 갔다
- “육군 간부가 16첩 반상 25인분 만들라 명령…교회 지인 대접”
- ‘카카오’ 검은 티에 흰 우산 집회…“브라이언 사과하라!”
- 초등생 호소문 “담배연기 괴로워…저는 ‘뛰지 마’ 혼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