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닥종이 좀 만들어주십시오

한겨레21 2023. 7. 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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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불경 찍으며 익힌 ‘제지 노하우’ 이주자에게 가르친 승려들, 조선시대 ‘닥나무 사물연대’ <조선의 과학기술사>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 푸른역사 펴냄, 2023년

한국사에서 19세기는 일종의 ‘무풍지대’다. 뭉근하게 끓는 냄비 안에서 서서히 익어가는 개구리처럼, 조선 역시 자신이 죽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조용한 소멸’을 향해 나아갔다는 게 이 시대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해다. 연구자들도 좀체 19세기사를 전공하려 들지 않는다. ‘조선의 르네상스’인 영·정조 대로 앞서가거나, 비극적일지언정 역동적이기라도 한 개항 이후로 넘어갈 따름이다.

19세기를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쇠퇴기’로 간주하는 이런 태도는, 그러나 어디까지나 ‘근대적’이고 ‘혁명적인’ 무언가를 기준 삼을 때의 이야기다. 양반 엘리트, 한성의 구중궁궐, 추상적인 관념과 사상에서 눈을 돌리면 지금까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19세기가 눈에 들어온다.

이정의 <장인과 닥나무가 함께 만든 역사, 조선의 과학기술사> 역시 그러한 시도 중 하나다. 과학기술사 연구자인 지은이는 사건과 물질을 아우르는 사물(事物), 구체적으로는 닥나무에 주목한다. 꺾을 때 ‘탁!’ 소리가 난다해서 닥이라는 이름이 붙은 닥나무는 유독 한반도에서 종이의 재료로 사랑받았다. 질기고 강인한 닥나무 특유의 물성(物性)은 비단 종이를 만드는 장인을 넘어, 조선사회 전반을 특유의 방식으로 변화시켰다.

기록을 중시하는 나라답게, 조선은 개국 초부터 수도와 지방에 공장을 세우고 장인을 등록시키며 종이의 관영 생산 체제를 구축했다. <경국대전>에 따라 종이의 생산과 유통을 관리하려던 야심 찬 기획은, 그러나 닥나무의 까다로운 가공 과정과 폭발하는 종이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국가가 채울 수 없던 공백을 메운 건 유교적 국가시스템의 바깥에 있는 사찰의 승려들이었다. 이들은 오랜 세월 불경을 찍어내며 익힌 제지(製紙) 노하우에 더해 산지에 있어 닥나무에 접근하기 쉽다는 지리적 이점은 물론, 촘촘히 이어진 연결망까지 갖추고 있었다. 자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종이 생산과 유통의 허브는 국가에서 사찰로 옮겨갔다.

닥종이 프로세스의 이런 ‘구조변동’은 조선 후기 내내 이어진 전국적인 이주의 흐름과 맞물렸다. 엄격한 통제사회였다는 편견과 달리 조선왕조는 안민(安民)의 기치 아래 조세를 동결하고 다수의 호적을 부러 누락시켰다. 그렇게 호적에 기록되지 않은 60%의 인구는 산으로, 해안으로, 섬으로, 심지어 국경 너머로 자유로이 이동했다. 물론 이동의 자유가 생계 안정까지 보장하진 못했을 터. 혈혈단신으로 낯선 곳에 당도한 이주자들에게 힘이 돼준 게 바로 사찰과 이들이 가진 제지기술이었다. 승려들은 이주자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이동하며 든든한 뒷배가 돼줬고, 무엇보다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전파했다. 조선의 19세기는 이렇듯 닥나무를 매개로 한 승려와 이주자의 연대에 따라 전개됐다.

닥나무가 매개한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닥 섬유의 강인함은 종이를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재활용하게끔 이끌었다. 그렇게 휴지(休紙)를 거쳐 환지(還紙)가 된 종이는 북방의 추위를 견디는 겨울 외투로, 가벼운 밥그릇으로, 튼튼한 신발로, 아름다운 공예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중국이나 일본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어떤 낭비도 없이 완벽하게 순환하는 ‘닥나무 사물연대’였다. 책에는 겨우 두어 번 나왔을 뿐인데도 여러 언론사 서평에서는 ‘반도체’라는 표현을 ‘야마’로 뽑았다. 조선 제지술이 세계가 경탄한 ‘첨단기술’이었다는 상찬일 텐데, 그것만으론 지은이의 의도를 설명할 수 없다. 마치 오늘날의 반도체처럼 닥종이는 조선사회에 깊숙이 자리했지만, 오늘날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선사회를 만들어갔다. 이 책은 그런 ‘다름’으로부터 미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이끌어내려는 야심 찬 도전이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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