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잘 몰라도…카카오 노조의 떨렸던 첫 집회
26일 오전 11시30분, 경기도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의 심장부인 판교역 1번 출구 앞이 분주해졌다. “이 쪽에서 큐알(QR)코드 찍고 출석 인증한 뒤 굿즈(기념품) 받으시면 됩니다.” 무슨 경품 행사라도 열렸나? 길 가던 시민들도 기웃거렸다. 이 날 이 곳에서 열린 카카오 공동체 노동조합(크루 유니언) 집회는 노조 설립 뒤 연 첫 집회였고, ‘평균 나이 30대’ 카카오 직원들도 ‘첫 시위’ 경험인 경우가 많았다. 낯설고 어색해하는 시선들과 내렸다 그쳤다 하는 비가 뒤섞였다.
12시,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에 맞춰 집회가 시작됐다. 식순에 따라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가 울려퍼지자, 300여명에 이르는 집회 참가자 대다수의 입이 얼어붙었다. 카카오 지회의 첫 집회를 응원하기 위해 달려온 상급 단체 민주노총 화섬(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네이버·넥슨·스마일게이트·한글과컴퓨터 등 판교에 기반을 둔 정보기술(IT) 업계 노조 깃발만 나부꼈다. ‘투쟁 발언’에 나선 이들조차 “처음이라 떨린다”는 말을 반복하며 어색해하는 집회였지만, 그만큼 큰 마음을 먹고 나온 자리이기도 했다.
“여러분! 제가 구호를 외치면 여러분이 두 번 따라 외치는 겁니다. 텔레비젼에서 본 적 있으시죠? 무책임 경영, 회전문 인사, 브라이언은 사과하라!” “사과하라! 사과하라!” 브라이언은 카카오 창업자 김범수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의 영어 이름이다. 노조에서 ‘드레스코드’로 준비해 나눠준 하얀 우산이 판교역과 이어진 미래형 건물 ‘카카오 판교아지트’ 앞에 물결을 이뤘다. 시간이 지날수록 함성은 점점 커졌다.
이날 집회는 카카오엔터테인먼트와 카카오엔터프라이즈에 이어 엑스엘게임즈에도 구조조정 바람이 불어닥치자, 카카오 공동체 노동조합이 긴급하게 마련한 것이었다. 카카오 공동체 노조는 계열사 직원들도 조합원으로 받고 있는데, 이날 현재 조합원 수가 4천명을 넘는다. 서승욱 지회장은 무대에 올라 “5년 전 노조 설립 초기에 카카오커머스 분사를 무리하게 추친한 것에 대해 브라이언을 직접 만나 재발방지 약속을 받은 뒤로 지금까지 단 한번도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있다”며 “국정감사에는 출석해도 직원(크루)들과의 대화에는 나타나지 않는 브라이언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집회 진행을 맡은 오치문 수석부지회장은 “카카오엔터프라이즈의 경영 실패에도 불구하고 백상엽 전 대표는 사과도 없이 떠나더니 고문 계약을 해 아직까지 회사의 곳간을 털고 있다”며 “이는 브라이언이 초래한 인맥경영의 한계”라고 비판했다. 집회에 참여한 30대 카카오엔터프라이즈 직원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고 느껴져서 집회에 참여해본 적이 없는데 오늘은 나왔다”며 “회사에서 기존 사업을 접는다면서 직원들을 압박해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응원 차 집회에 참여한 판교의 한 정보기술 기업 노조 지부장은 “최근 1년 새 카카오 최고경영자(CEO)가 4번이나 바뀌고, 분사 강행 이후 경영 실패 때마다 구조조정을 통해 직원들만 내모는 등 ‘흉한 일’을 당해온 직원들이 이제라도 나선 것을 같은 업계 사람으로서 응원한다”고 말했다.
30분이 채 안돼 첫 집회를 마친 카카오 노조는 김범수 창업자 겸 미래이니셔티브센터장을 수신인으로 회사 쪽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항의 서한에는 “경영진의 탐욕으로 카카오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서비스를 잘 만들고 키우는 것보다 얼마짜리 회사를 만들지에 과하게 집중한다. 리더는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 앞에서는 말 못하고, 뒤에서는 조정하려 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정말로 카카오가 다시 사랑받는 기업이 되길 원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판교/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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