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화면에 익숙한 사진이 보였다. 김수영 시인의 사진이었다. 강연을 맡은 김혜나 작가는 “시인이 서강(한강의 서쪽, 마포) 집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해요”라고 말했다. 이어 “김수영 시인하면 어떤 시가 떠오르세요?”라고 물었다. 몇몇이 “풀”이라고 대답했다.
다음 화면에 김수영 시인의 대표작인 ‘풀’ 전문이 나타났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라는 국어 시간에 배웠던 바로 그 시였다.
“시를 이해하려면 시인의 삶을 알아야 하죠. 특히 김수영 시인은요.” 그와 그의 시를 잘 몰랐던 내게 크게 들렸다.
얼마 전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안내문을 봤다. 집에서 가까운 마포 서강도서관에서 7월부터 9월까지 10회에 걸쳐 강연과 탐방, 모임 등을 진행하고 있었다. ‘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은 문화체육관광부 주최, 한국도서관협회가 주관하는 사업으로 2013년부터 시작됐다. 지역주민들이 가까운 도서관을 통해 생활 속에서 쉽게 인문학을 접하도록 마련됐다. 전국 공공도서관에서는 강연과 관련 탐방 등을 연계해 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직접 참여한 적은 없었다. 안내문에는 ‘단지 느슨하게 연결되고픈 우리를 위하여’라는 슬로건으로 마포에 관해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눠 알아본다고 했다. 특히 이 지역이 김수영 시인이 마지막에 살며 가장 애착을 지닌 곳이라는 말에 끌렸다. 내가 마지막 신청자였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인문학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에 좀 놀라웠다.
인문학 강연에 어떤 사람들이 모일지 궁금했다. 흰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어르신은 이미 도서관에서 대여한 김수영 관련 책을 들고 있었다. 개성 강한 헤어스타일의 한 남성은 핸드폰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내 눈에는 김수영 시인과 똑닮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연령이나 모습은 달라도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같지 않을까.
“솔직히 전 학생 때 처음 ‘풀’을 읽고 큰 울림을 받진 않았어요. 오히려 뒤늦게 대학에 가서 관심이 생겼는데요. 도서관 학술논문 코너에 김수영 시인 연구 논문이 제일 많았거든요.”
강사의 말에 위안이 됐다. 지금껏 김수영 시인 작품을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학창시절, ‘풀’은 민중, 바람은 억압을 상징한다는 교과서 속 ‘시’로만 알았다. ‘폭포’란 시도 부정적인 현실을 극복하며 살아간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직설적인 시어였지만 오히려 내겐 어려웠다. 왜 폭포가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졌는지, 왜 풀은 바람보다 먼저 누웠을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살던 시대는 격변의 시기였다. 일제강점기에서 6.25를 거쳐 한국사의 고단했던 길을 울퉁불퉁하게 걸어왔던 거다. 특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반공과 친공세력의 무자비한 모습은 그에게 큰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런 그의 삶에 안정을 준 건, 마포에서 닭을 키우면서였다.
“마포에서 한 양계가 천직이라고 생각했대요. 나중에 사료값이 오르니까 번역을 해서 번역료로 양계를 유지했다고 해요.”
강연에서 그의 생애를 시대 별로 나눠 작품과 비교했다. ‘그 시절 내가 살았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게끔 했다. 그는 온몸으로 시를 썼다.
그가 살았던 서강 집(마포)은 이곳 도서관에서 불과 도보 8분 거리다. 그가 다닌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도 가깝다. 모두 그가 시를 쓰기 위해 숨 쉬던 지역 주변이다. 그와 같은 공기를 마시진 못 했지만, 그의 눈 속에 들어온 거리가 이 근처라는 점에 친근감이 들었다.
강사는 마지막 화면에 ‘풀’을 다시 보여줬다. 이 시간을 통해 난 김수영의 삶을 얼마나 알 수 있었을까. 간단하게 그의 작품을 좋아하게 됐다고 쓰고 싶다.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난 그의 생애를 알아볼 생각이나 했을까. 두 시간으로 그가 살았던 48년의 세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그의 시가 강연 시작 때와는 확연히 다르게 느껴졌다.
“서강에서 생활은 김수영 시인이 가장 치열하게 작품 활동을 했고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누린 시기였는데요. 여러분들도 주변을 산책하며 당인리나 한강변을 볼 때 김수영 시인의 정서와 삶, 문학을 한 번 돌아보시면 좋겠어요.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가 조금 새롭고 다양하게 보이지 않을까 싶네요.”
앞으로 난 구수동을 가게 되면 김수영 시인을 떠올릴 듯싶다. 그리고 그가 서 있던 길 역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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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책기자단 김윤경 otter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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