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변호사 피살사건 미궁 속으로…공범 살인혐의 최종 무죄
“정황증거만으로 살인 고의 인정 어렵다”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장기 미제 사건 중 하나인 ‘제주 변호사 피살사건’ 공범으로 지목된 피고인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광주고법 제주 형사3부(부장판사 이재신)는 26일 오전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모(57)씨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제주지역 조직폭력배 유탁파 행동대원이던 김씨는 1999년 8∼9월 누군가의 지시와 3000만원을 받고 동갑내기 조직원 손모씨와 함께 이승용(당시 45세) 변호사를 살해하기로 공모한 혐의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김씨는 손씨와 함께 이 변호사를 미행해 동선을 파악했고 구체적인 가해 방식을 상의한 것으로 검찰은 판단했다.
손씨는 두 달 동안의 준비를 거쳐 그해 11월 5일 새벽 흉기로 이 변호사의 가슴과 복부를 세 차례 찔러 숨지게 한 혐의를 받았다.
이후 두 사람이 검거되지 않으면서 이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사건은 21년 만인 2020년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김씨가 SBS 시사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자신이 1999년 손씨를 시켜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손씨는 2014년 이미 숨진 상태였다.
김씨는 살인죄 공소시효(당시 15년)가 지났다고 생각했지만, 해외 체류 때문에 시효가 정지돼 처벌이 가능한 상태였고, 그는 곧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공모자 중 일부만 범행 실행에 나아간 경우, 실행을 직접 담당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공동으로 범죄 책임을 묻는 공모공동정범 법리를 김씨에게 적용해 살인죄를 물어야 한다고 봤다.
다만,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한 공소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로 피고인 진술과 여러 관련자의 증언 등 간접 증거밖에 없어 유죄를 입증하는 데 애를 먹었다.
김씨는 재판 과정에서 혐의를 전부 부인했고 1심 재판부는 살인 혐의에 대해 직접 증거가 없고, 간접증거만으로 유죄를 인정하려면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로 사실이 증명돼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1심 무죄 판단을 깨고 김씨 살인 혐의에 대해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김씨가 손씨와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범행에 본질적 기여를 했고, ‘기능적 행위 지배’를 통해 범행 실행 행위를 분담했다고 판단했다.
또 직접 증거는 없지만 검찰 측이 논리와 경험법칙에 위배되지 않는 간접증거를 충분히 제시했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지난 1월 김씨의 방송 진술이 객관적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결론냈다.
‘이 변호사를 혼내주라’고 최초 지시했다는 폭력조직 두목은 당시 수감 중이었고, 살인을 직접 실행한 손씨를 어떻게 도피시켰는지에 관한 진술은 모순되거나 일관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김씨 진술이 형사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만한 신빙성을 갖췄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피고인 본인 진술’이라는 간접증거만 있는 상태에서 진술의 주요 부분과 맞지 않는 객관적 사정이 드러났다면, 섣불리 공소사실을 유죄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결국 대법원은 추가 심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원심을 무죄 취지로 파기해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고 법원은 이날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이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14기로 김진태 전 검찰총장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홍준표 대구시장과 동기이며, 서울지검 등에서 검사로 재직하다 1992년 고향 제주로 내려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이후 이 변호사는 1998년 지방선거 당시 제주도지사 후보 측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인물의 양심선언을 돕고, 제주지역 폭력조직이 도지사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사건 직후 수사본부를 설치한 경찰은 형사는 물론 의경까지 동원, 현장 주위를 포위해 증거물 찾기에 나섰고 현상금도 걸었다.
심지어 반상회까지 열어가면서 사건 해결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우발, 원한, 치정 등 어디에서도 실마리는 나오지 않아 사건은 미제 살인사건의 표본으로 남았다. 당시 이 변호사 사건 기록은 6000쪽에 달하는데, 2개의 라면상자에 담겨 봉입된 채 제주경찰 문서고에 보관됐다.
제주=임성준 기자 jun258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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