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죄 시효만료 자수한 조폭…‘29년만에 감옥’
행동대장 정동섭 공개수배
[헤럴드경제(광주)=황성철 기자] 살인사건 공소시효 만료를 노리고 밀항 시기를 거짓 진술한 조직폭력배가 덜미를 잡혀 살인죄로 처벌받게 됐다.
26일 광주지방검찰청에 따르면 28년 전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조직폭력배들이 집단으로 상대 조직원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4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당시 조직원 대부분이 검거됐으나 2명은 도주했다.
이 중 1명은 지난해 공소시효 만료를 예상하고 자수했다가 검찰 수사로 살인죄 처벌을 받게 됐으며, 잠적한 다른 1명은 검찰이 공개수배했다.
◇ 1994년 조폭 살인사건 공범, 지난해 자수
2022년 3월 중국 선양 한국영사관에 50대 남성이 찾아와 밀항 범죄를 저질러 이곳에 왔다고 자수했다.
이 남성은 서모(55)씨로, 28년 전 서울 강남구 ‘뉴월드호텔 조폭 살인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폭력조직 영산파의 행동대원이었다.
이 사건은 영산파 조직원 12명이 1994년 서울 강남의 호텔 결혼식에 참석한 다른 조직 폭력배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4명의 사상자를 냈다.
1991년 자신들의 두목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지만 사실을 오인해 엉뚱한 폭력조직원을 상대로 무차별 폭력을 행사했다.
영산파 조직원 12명 중 10명이 붙잡혀, 무기징역에서 5-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공범 중 달아난 2명은 사건 이후 자취를 감췄는데 이중 서씨가 지난해 갑자기 중국에서 자수했다.
국내로 압송돼 해경의 수사를 받은 서씨는 중국 밀항 시기를 2016년이라고 주장했다.
서씨 말대로라면, 뉴월드호텔 살인사건 발생 시기인 1994년 기준으로 살인죄 공소시효인 15년이 이미 지나 서씨를 살인죄로 처벌할 수 없다.
결국 불법 밀항 혐의만 적용돼 불구속 상태로 입국해 검찰로 넘겨진 서씨는 풀려나 자유인이 됐다.
◇ 검찰 수사로 공소시효 만료 전 해외도주 밝혀져
해경으로부터 사건을 넘겨받은 광주지검은 전담수사팀을 꾸려 서씨의 밀항 시기부터 조사했다.
서씨와 관련자들의 27년 치 계좌 정보를 확인하고, 공범들의 14년 치 교도소 접견 녹취록 등을 분석해 2005~2007년 중국에서 서씨를 봤다는 다수의 목격자 진술과 공범들의 교도소 접견 발언 등을 증거로 확보했다.
자수 후 1년간 전남의 한 지역에서 살던 서씨를 긴급체포한 검찰은 이렇게 확보한 증거를 서씨 앞에 들이밀었고, 서씨는 밀항 시기를 속인 사실을 자백했다.
조사결과 서씨는 1994년 사건 직후 도주해 숨어 지내다가, 2003년 가을 전북 군산에서 선박을 타고 중국으로 밀항했다.
중국 공안의 눈을 피해 공장 등을 전전하며 도피 생활을 하면서도, 함께 검거되지 않았던 영산파 행동대장 정동섭과도 중국에서 수차례 만났다.
또, 가족까지 중국으로 불러들여 재회하는 등 대범한 도피행각을 벌였다.
약 20년간 오랜 해외 도피 생활에 지친 서씨는 밀항 시점을 살인사건 공소시효(15년) 완성 이후인 2016년으로 주장하면 살인죄 처벌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허위 시나리오를 꾸며 자수했다.
하지만 서씨 밀항 시기가 2003년이면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에 해당해 해외 체류 기간 공소시효는 정지된다.
여기에 2015년 살인죄 공소시효까지 폐지돼 서씨는 28년 전 저지른 살인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올해 6월 살인과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기소 해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서씨는 26일 밀항단속법위반죄도 추가 기소됐다.
◇ 마지막 남은 도주 공범 ‘공개수배’
검찰은 뉴월드호텔 살인사건에서 달아난 주범 정동섭(55)을 26일 공개수배했다.
영산파 행동대장이었던 정씨는 서씨와 마찬가지로 범행 후 국외 도피 사실이 확인됐지만, 압수수색 등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눈치채고 잠적했다.
중국으로 밀항했던 정씨는 2011년 살인죄 공소시효가 만료되 ‘공소권 없음’ 처분된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몰래 국내로 입국해 정상인으로 생활했다.
중국 도피 시절에도 영산파 조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생수 사업을 하고 안마방을 운영했던 정씨는 국내로 돌아온 뒤에도 건설업체 임원, 투자회사 운영 등 여러 사업에 관여했다.
그러나 서씨의 거짓 밀항 사실이 적발되면서 정씨도 살인죄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다시 도망자 신세가 됐다.
검찰은 서씨와 정씨의 밀항과 도주 행각을 도운 다른 영산파 조직원 등에 대해서도 다각도로 수사하고 있다.
서씨의 오랜 해외 도피도 뉴월드호텔 사건으로 와해한 것으로 보였던 영산파가 사실은 여전히 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산파 조직원들은 서씨와 또 다른 도주 공범의 도피 생활을 지원했고, 국내에서는 서씨의 경조사까지 챙겼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현재도 수감 중인 조직원에게도 영치금과 가족 생활비로 10년간 3억 2300만원을 지원하며 교도소 접견도 계속한 것으로 확인됐다.
광주지검은 “‘검·경 조직범죄 대응 수사기관 협의회’를 구성했다”며 “도주 중인 조직폭력배 정동섭을 끝까지 추적해 죄에 처벌을 받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hw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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