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잃지 않았다"…컬러사진에 담긴 정전 후 대한민국

손형주 2023. 7. 26.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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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참전국 스웨덴·노르웨이 참전용사가 촬영한 사진 공개
유엔평화기념관 하반기 특별기획전…사진·소장품 등 전시
미군용 구급차 앞 환자들 [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부산=연합뉴스) 손형주 기자 = 미군용 구급차 앞 환자복을 입은 남자 4명은 전쟁의 아픔을 잠시 잊고 카메라 앞에서 환한 미소와 함께 포즈를 취한다.

팔과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어린아이는 아픔을 잠시 잊은 듯 해맑다.

70년이 지난 낡은 필름 속에 남아 있는 6·25 전쟁 정전 직후 모습이다.

유엔평화기념관은 6·25 전쟁 소장품 모으기 캠페인에서 수집한 사진을 정전 70주년(7월 27일)을 맞아 연합뉴스에 26일 일부 공개했다. 언론에는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유엔기념관은 의료지원국으로 참전했던 스웨덴, 노르웨이와 전투지원국으로 참전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지난 6월 실무단을 보내 6·25전쟁 참전용사와 유가족들로부터 정전 직후 부산과 대한민국의 모습이 담긴 소중한 사진과 소장품을 수집했다.

스웨된 적십자병원 정문 [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스웨덴 적십자병원 참전용사가 기록한 정전 직후 부산

스웨덴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자국에서 경비를 부담하는 적십자병원을 지원할 뜻을 UN에 전달했다.

이후 스웨덴 각지에서 600여명이 자원했고 최종적으로 그루트 대령 등 170여명을 한국으로 파견했다.

1950년 9월 23일에 도착한 스웨덴 의료진은 미 제8군에 배속돼 옛 부산상고 터에 병상 400개 규모의 후방 병원을 개소하고 같은 달 25일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스웨덴 의료지원부대는 스웨덴적십자병원(The Swedish Red Cross Hospital-SRCH)으로 명명됐고 부산에서는 서전병원 또는 스웨된 적십자 야전병원으로 불렸다.

스웨된 적십자병원 본관 [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정전협정 이후에도 스웨덴적십자병원은 '부산스웨덴병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부산으로 모여든 전상자, 피란민, 극빈자들을 헌신적으로 치료했다.

스웨덴은 한국 파견 의료지원 부대 중 가장 오랫동안 머무르며 1954년 7월 철수하기까지 6년 6개월간 의료 활동을 이어갔다.

파견된 의료인만 1천124명에 달하며 약 200만명의 환자를 돌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후 스웨덴은 1958년 노르웨이, 덴마크와 함께 서울에 국립중앙의료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며 한국의 의료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카타리나 에릭손(Katarina Eriksson) 스웨덴한국전참전협회장은 지난 6월 스웨덴을 찾은 유엔평화기념관 실무단에게 소중한 컬러 사진을 건넸다.

그의 부친이자 6·25 전쟁 당시 스웨덴 참전 의료진이었던 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이 정전 직후인 1953년 7월부터 12월까지 부산에서 촬영한 사진들이다.

수술 중인 스웨덴 의료진 [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 속에는 스웨덴 적십자 병원의 수술 장면부터 병원에서 치료받는 군인과 민간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전쟁의 아픔을 겪은 아이들은 병상에 누워 파란 눈의 외국인이 든 카메라가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본다.

어린이 환자들 [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사진 속에는 전쟁 직후 삶의 터전을 옮긴 피란민과 임시수도 역할을 했던 부산의 모습도 있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과일을 고르는 시민부터 엄마를 따라온 것으로 추정되는 소녀가 시장에 주저앉아 나물을 파는 모습도 눈길을 끈다.

부산의 시장 모습 [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부산의 시장 모습 [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산복도로에서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에는 부산으로 모여든 피란민들이 가족들과 만남을 기약한 영도다리(영도대교)와 당시 부산의 모습도 보인다.

부산전경, 왼쪽 좌측 끝에 영도다리가 보인다. [잉바르 스벤손(Ingvar Svensson)·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아픔을 잠시 잊은 아이는 해맑았다…이동외과 병원 운영한 노르웨이

6·25 당시 이동외과병원을 운영했던 노르웨이도 실무단에 소중한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은 노르웨이 참전 의료진 페터 렉소브(Peter Lexow) 박사와 닐스 에겔리엔(Nils Egelien) 보초병(1995-2019 한국전참전협회장)이 촬영했다.

노르웨이는 유엔으로부터 요청받고 적십자 의료지원 부대를 파견했다.

동두천 하늘에 휘날리는 노르웨이 국기 [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철수 모습 [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한국에 도착한 노르웨이 의료지원단은 유엔군 사령부 의무 당국과 협의한 후 의정부 쪽으로 이동해 천막으로 이루어진 임시 진료소를 차리고 업무를 시작했다.

이후 동두천으로 이동해 의료지원 활동을 하며 노르웨이 육군 이동외과병원(NORMASH : Norwegian Mobile Army Surgical Hospital)이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과나무 아래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은 1951년 7월 19일부터 1954년 10월 18일까지 의료지원 활동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병원에는 수술실·치과·방사선실·시약실·회복실·조제실 등 시설과 최신 의료 장비를 갖추고 있어 중상을 입은 전상자들이 수술하고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각종 진료소 사이에 사과나무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당시 이동외과병원을 사과나무정원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의료진은 야전병원 고유의 임무인 전상 장병 치료뿐 아니라 민간인 치료에도 최선을 다했다.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 의료진 [유엔평화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약 3년 3개월 동안 총 9천600여 차례의 수술이 이뤄졌으며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을 때는 하루에 최대 64회의 크고 작은 수술을 실시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1954년 철수 시까지 외과병원에서 치료받은 환자는 9만명 이상으로 기록돼 있다.

부상후 회복 중인 아이들 [유엔평화 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유엔평화기념관은 올해 말 열릴 예정인 정전 70주년 특별기획전에서 수집한 나머지 사진들과 참전용사 소장품 등을 공개할 예정이다.

스웨덴적십자병원이 받은 이승만대통령 표창장, 스웨덴 의료진의 개인 소지품(수트케이스, 여권, 항공권, 백신접종 증명서, 환자에게 받은 선물), 또 노르웨이 이동외과병원이 받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감사장과 각종 보고서도 전시한다.

handbrother@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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