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십 돼서야 한글을 배우게 됐다…나는 공부가 재미있다”
“나는 팔십이 되어서야 한글 공부를 배우게 되었다. 몸이 아프고, 눈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공부가 재미있다.” (서일남씨의 6월28일 일기 ‘한글 공부’)
강원도 강릉에서 문해 교육을 받은 60~80대 여성들이 발행한 학급 문집에 실린 글의 한 대목이다. 문집에는 늦게 시작한 공부에 대한 즐거움과 함께 자신의 삶을 글로 풀어내는 것에 대한 기쁨이 듬뿍 담겼다.
26일 강릉 성덕등불학교는 “최근 학교 ‘금빛반’ 학생들 7명이 문집 ‘금빛반 이야기’를 발행했다”고 밝혔다. 김경남, 서일남, 안정숙, 이경숙, 이옥동, 이정경, 한숙자씨 등 강릉 성덕등불학교 금빛반 학생 7명이 한 학기 동안 쓴 일기 69편을 모았다. 강릉시 종합자원봉사센터에서 운영하는 성덕등불학교는 시민들에게 문해 교육과 초·중·고교 검정고시를 지도하는 곳이다.
60~80대 여성인 금빛반 학생들은 일기에 교육받으며 느낀 즐거움과 설렘을 담았다. “‘참 나도 이렇게 배울 수도 있구나.’ 나는 요즈음에는 살맛이 난다.”(이옥동) “실력을 쌓아서 중학교에 가는 게 목표다. 우울증이 있었는데 좀 좋아진 것 같다.”(안정숙) “배움에는 끝이 없다 했던가. 나는 잘려 나간 어린 시절 나의 시간, 나의 길을 다시 찾을 것이다. 아자! 경남아, 홧팅!!”(김경남)
일상의 소소함이나 가족을 향한 사랑을 담은 글도 있었다. “오늘은 시장에 갔다. 나는 이거저거 구경한다. 재미있다. 개두릅, 참두릅, 이름 모르는 나물이 많이 있다. 나도 참두릅을 샀다. 마늘쫑도 샀다.”(서일남) “주말은 경포에 벚꽃도 구경하고, 네발자전거도 타고, 점심은 삼척에 대게 먹으러 갔다. 벌써 꽃이 많이 지고 있다. 벚꽃은 너무나 아름답고 예쁘다.”(이경숙) “남편은 다른 사람들보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탄다. 아직 여름은 시작일 뿐인데 남편이 안쓰럽다.”(한숙자)
친구들과 선생님을 향한 애정도 표현했다. “오늘은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학교 친구들은 오늘은 무엇을 배웠을까?”(한숙자) “선생님을 만나고 좋은 분들과 함께여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났다. 기분이 이상했고 또 행복했다.” (이정경)
학생들을 가르친 김문선 교사는 지난 25일 한겨레에 “오늘 문집을 학생들에게 나눠줬다. 다들 신기해하면서 매우 기뻐했다. 자기가 쓴 글이 활자로 인쇄돼 찍혀 나온 걸 처음 본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자신이 쓴 글을 읽으면서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고 한다. 김 교사는 “학생들이 처음에는 일기를 왜 써야 하냐고 묻기도 했는데, 문집이 나온 후 방학 숙제로 일기를 써오라고 하니 모두 웃으며 즐거워했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학생들이 일주일에 두 번씩 꾸준히 일기를 쓴 덕분에 나날이 글쓰기가 늘어가는 게 보여서 뿌듯했다”며 “글에서 솔직하고 진솔은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문집은 3호로, 지난해 7월에 1호, 12월에 2호가 나왔다.
‘금빛반 이야기’ 문집 일부
아들과 운동 / 김경남
아들은 자전거 타고 경포호 세 바퀴, 나는 걸어서 한 바퀴,
중간중간 아들 만나면 물을 주고 힘들게 걷노라니,
엄마 오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물가에서 무엇인가 열심히 먹는다.
엄마 오리는 주위를 이쪽저쪽 살피며
내가 사진 찍으러 가까이 가니 경계 태세를 취한다.
너무 더웠다.
그래서 잠시 동안이지만
나도 오리처럼 물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저만치에서 아들이 온다.
아들 얼굴에 땀방울이 맺혔다.
(2023년 6월 28일 수요일)
어버이날 / 서일남
5월 5일 어린이날에 우리 집에 평창 큰딸 가족이 왔다.
대전에 둘째 딸네 가족도 왔다.
우리 집에 두 집 가족이 합치니,
혼자 있다가 열 명이 모였다.
정신이 없다.
먹는 것도 정신이 없다.
북적북적 한다.
손자들이 난리 치니까 정신이 없다.
먹는 것도 와작와작한다.
가니까 집이 텅 비는 것 같았다.
(2023년 5월 8일 월요일)
대구 여행 / 안정숙
내 생애 두 번째 대구 여행을 갔다.
처음 40년 전 큰외삼촌이 사실 때 가고,
이번은 생전 처음 시티투어를 했다.
김광석길 구경하고,
대구에서 제일 높은 곳 야경을 투어하고,
수성못에도 가고,
다음날 김천 김호중길이랑 예술고등학교랑 연화지를 다녀왔다.
연화지 연못에 피어있는 연꽃잎이 예쁘다.
학교에 있는 김호중 사진전이 너무 좋았다.
김호중 팬으로서 너무 좋았다.
선생님 / 이경숙
아침에 첫 시간에는 기본으로 구구단을 외우고,
곱셈 문제도 하고, 칠판에 써 놓은 곱셈 문제도 했다.
선생님이 화요일에 쓴 편지를 주시며, 자기가 쓴 편지를 읽어 보라고 하여 편지를 받아 들고 읽어 볼려고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서 읽지 못하고, 선생님이 대신 읽어 주셨다.
(2023년 5월 4일 목요일)
집에서 / 이옥동
점심을 먹고 밭에 나가서 보니
마늘이 파릇파릇 올라온다.
이걸 보니 떠오른다.
이런 만물들은 봄이 오면 잊지 않고 올라오는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이상할까?
사람은 한번 가면 오지 못하는데.
(2023년 3월 14일 화요일)
소중한 나의 시간 / 이정경
모처럼 조용하다.
몸도 마음도 평화롭다.
집을 꽉 채운 손님들이 오늘 갔다.
나에게는 청소가 남았지만…….
천천히 해야지. 우선은 조금 자고 싶다.
너무 졸려서 정신이 없다.
지금이 나에겐 너무 소중한 시간이다.
(2023년 5월 21일 일요일)
영화 이야기 / 한숙자
밖에는 비가 내리고 날씨는 쌀쌀하다.
아들하고 같이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며 하루를 보냈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라는 전쟁 영화다.
보고 나서도 여운이 남는다.
전쟁은 꿈 많은 젊은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연상하게 하는 영화였다.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생각이 한참 머릿속에 남아있다.
(2023년 4월 15일 토요일)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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