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만 챙기고 위험은 넘겼다골칫거리 된 ‘이지 머니’ 그림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주요국 중앙은행은 초저금리와 함께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정책을 펼쳤다. 이 같은 금융 완화 상태가 금융 긴축(tight money)의 반대여서 ‘이지 머니(easy money)’라고도 불렀다. 영어사전에서 ‘easy money’의 본뜻은 ‘쉽게 번 돈’이다. 시중에 돈이 많아지면 투자금을 쉽게 빌릴 수 있게 된다. 실제 초저금리 시대에 쉽게 돈을 번 이가 상당하다.
금융 긴축으로 상황이 바뀌면서 ‘이지 머니’가 경제를 위협하는 괴물이 됐다. 싸게 많이 끌어온 돈으로 큰 수익을 낸 곳들이다. 과도한 차입(leverage)이 촉발한 기대위험(risk)과 기대수익(return) 간 균형이 파괴된 결과다. 차입비율은 높은데 투자 주체의 위험 부담이 작다는 것은 문제가 생겼을 때 파장이 훨씬 더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구조적 개선방안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부동산 PF “적게 내지만 다 먹는다”...‘시행사들 빚의 바벨탑’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은 우리 경제의 가장 큰 고민 가운데 하나다. 시행자는 건물 지을 땅을 사기 위해 시행사를 설립한다. 이때 시행자가 내는 돈은 땅값의 10% 남짓이다. 나머지 돈은 금융회사에서 빌려 오는데 땅만으로는 담보가 부족해 시공사(건설사)나 증권사의 보증을 더한다. 건설사로서는 일감을 확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증을 제공해야 했다. 증권사는 실제 돈을 직접 빌려주지 않고도 보증으로만 높은 수수료 수익을 얻을 수 있어 적극적이었다.
증권사들은 과연 부동산 PF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을까? 금융감독원은 지난 24일 22개 증권사가 지급한 성과급 내용을 공개했다. 2021년에는 전체 성과급 1조2141억원 가운데 5458억원이, 2022년에는 7345억원 가운데 3525억원이었다. 지난해 하반기 자금난으로 유동성 지원을 받은 증권사들도 770억원을 지급했다. 성과급이 이 정도면 회사는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다는 뜻이다.
땅을 확보하는 것까지가 브리지론(bridge loan)이다. 땅 구입 후 개발 허가가 나면 본PF로 전환한다. 땅값으로 빌린 돈과 이자는 새로운 금융회사에서 빌려서 갚고, 공사대금은 분양으로 마련한다. 선분양을 위해서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분양보증이 필요하다. 대신 땅값을 빌려준 금융회사는 담보권 행사가 제한된다. 분양 전망이 어두우면 브리지론에서 본PF로의 전환이 쉽지 않은 이유다.
저금리 시대에는 돈을 빌려 부동산을 사는 이가 많았다. 땅 사서 건물 지으면 대부분 ‘완판’됐다. 분양 대행으로 돈을 번 이들과 건설사도 시행에 뛰어들었다. 총 사업비의 3%만 투자하면 개발이익 대부분을 챙길 수 있는, 이른바 ‘대박 아이템’이 됐다. 1000억원짜리 개발 프로젝트가 있다고 치자. 땅값이 300억원, 시공비가 600억원, 개발이익이 100억원이라면 시행사는 땅값의 10%만 내면 된다. 30억원을 투자해 100억원을 버는 셈이다. 투자금 대비 30배 가까운 차입(leverage) 덕분에 가능한 결과다. 미국은 시행사가 땅값을 빚이 아닌 자본으로 조달한다. 총 사업비의 10%를 투자하므로 차입비율이 우리의 3분의 1 이하다. 시행사 위험 부담이 커 그만큼 사업 추진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적게 내고 많이 버는 구조는 사업이 잘 안 될 때 부작용이 심각하다. 많이 내고도 적게 버는 쪽이 손실을 더 많이 떠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300억원어치 땅을 샀는데 개발이 좌초되면 시행사는 30억원만 손해 보면 된다. 270억원을 빌려준 금융회사는 땅값 하락폭에 따라 30억원 이상 손실을 볼 수도 있다. 이 같은 사업장이 많으면 금융회사 손실이 금융시장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다고 이 금융회사들을 도와주기도 모호하다. 대부분이 제2금융권인 이 회사들은 부동산 호황기에 큰돈을 벌었고 관련 덕분에 천문학적 성과급 잔치까지 벌였다. 돈 잘 벌 때 위험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위험에 대한 경계로 자칫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애꿎은 대출자들이 추가 이자 부담을 져야 한다. 금융회사들의 위기를 방관만 하기 어려운 이유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등 감독당국이 무엇을 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자금의 97%까지 차입이 되는 구조가 가능한 게 정상일까? 금융당국의 권한이 강력한 이유는 금융회사의 탐욕이 자칫 경제위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 전체의 기회비용을 줄이기 위해 위험 대비에 더 철저했어야 했다. 앞서 교훈도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촉발한 미국의 비우량주택담보대출(subprime mortgage), 2021년 중국의 부동산 거품 붕괴를 촉발한 개발사 헝다(恒大)그룹 사태다.
약달러에 묻지마 투자...‘사상누각’된 해외부동산 사모펀드
2019년 금융권은 사모펀드 사태로 홍역을 치른다. 해외파생결합펀드(DLF) 불완전판매와 라임펀드 등의 비정상적인 판매와 운용 때문이다. 금융회사가 문제 많은 상품을 팔아 돈을 번 사건이다. 그런데 사모펀드 사태를 겪고도 금융권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저금리가 끝나자 이번에 해외부동산 사모펀드에서 부실한 투자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기관투자자들은 증시 부침에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수익이 가능한 자산을 모색했다. 국채는 안전하지만 저금리로 충분한 수익(yield)을 내지 못했다. 마침 국내에서도 부동산이 뜨던 때다. 해외부동산은 임대수익에 자산가격이 오르면 시세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었다. 마침 미국의 초저금리와 양적 완화로 달러 약세가 진행되며 원화가치도 높아졌다. 금융위기 이전 해외펀드 열풍 때처럼 너도나도 해외부동산에 뛰어들었다.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부동산시장에서는 중국이 가장 큰손이었고 그 뒤를 한국이 이었다. 금융위기와 재정위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국과 유럽의 큰손들이 내놓는 매물을 이들이 소화했다. 금융투자협회 자료를 보면 2008년 말 해외펀드 설정액 77조원 가운데 부동산펀드는 2.28%인 1조8000억원에 불과했다. 올 6월 말 해외펀드 설정액은 300조원, 부동산펀드는 76조원으로 25%가 넘는다.
해외부동산 투자가 폭증한 것은 2016년부터다. 2015년 증시 폭락을 겪은 중국이 자본 통제에 나서면서 글로벌 부동산시장에 빈자리가 생겼다. 글로벌 투자은행(IB)과 중개회사의 부동산 영업은 한국에 집중됐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한국의 기관투자자들을 만나러 오는 중개인도 상당했다. 모건스탠리캐피털그룹인덱스(MSCI) 실물자산 자료를 보면, 한국은 2019년 유럽 상업용 부동산시장에서 미국 다음으로 큰 외부 투자자였다. 2019년에만 18조5000억원을 거래할 정도였다.
짧은 기간에 왕창 사들였으니 값을 높여 비싸게 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한국 투자자들이 사들인 상업용 부동산의 최근 가격 하락폭이 시장 평균보다 큰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비싼 거래를 성사시킨 IB들과 중개인들만 두둑한 수익을 챙긴 셈이다. 1980년대 일본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가 강세가 되자 해외부동산 쇼핑에 무리하게 나섰지만 결국 ‘호구’가 됐다.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수(exit) 전략’이다. 덩치가 큰 상업용 부동산은 거래가 쉽지 않다. 잘 팔리지 않으면 부득이 장기 보유해야 한다. 부동산 투자는 대부분 대출을 수반한다. 금리 변화에는 민감하다. 단기뿐 아니라 중장기 위험에도 대비해야 한다. 길게 보유하면 개보수비용도 변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국내 투자자들의 해외부동산 투자에는 이런 위험들이 과소평가됐다.
금융감독원 집계를 보면 올해부터 2025년까지 해외부동산펀드 만기물량이 전체 설정액의 40%에 육박하는 30조원에 달한다. 만기에 건물을 제때 팔지 못하면 재대출(refinancing)이 필요하다. 이자율이 올라가면 수익성이 악화된다. 공실까지 늘어난다면 설상가상이다.
미국 부동산서비스업체 CBRE가 집계한 올 3월 말 전 세계 오피스 공실률은 12.9%로, 글로벌 금융위기 충격이 정점이던 2009년 13.1%에 버금간다. 미국 주요 도시인 LA와 샌프란시스코 등은 20% 이상이고, 유럽 도시들도 20%에 육박한다. 금리 상승과 비대면문화 확산 결과다.
수요 흐름 변화에 따른 개보수비용에 대한 대비도 소홀했다.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직원들을 출근시키기 위해 최신 시설을 갖춘 사무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최근 5년간 한국 투자자들은 장기 임대계약만 돼 있으면 입지나 친환경 등급, 개보수비용 등에 대한 고려 없이 미래 수요가 제한적인 구식(2등급) 빌딩을 주로 사들였다는 게 블룸버그의 분석이다.
펀드 만기에 재대출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헐값에라도 팔아야 한다. 선순위 투자자라면 웬만큼 헐값에 팔아도 원금 손실은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중순위나 후순위 투자자라면 헐값 매각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부동산 투자이지만 원금 대부분을 날리는 결과가 충분히 나올 수 있다. 국내 금융회사들은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선순위가 아닌 투자를 상당 부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위험 분산을 위해 이를 금융상품으로 만들어 개인고객에게 판매(sell down)까지 했다.
해외부동산 투자에는 연기금과 공제회도 적극적이었다. 대규모 손실이 발생한다면 가입자들의 노후자금에도 타격이 크다. 공적 연기금과 공제회는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고 있다. 수출 둔화로 최근 경상 적자가 심각하다. 해외부동산 투자 실패로 막대한 달러가 증발한다면 경제에 상당한 부담이다. 단기간에 엄청난 국부가 특정 자산으로 몰리는 상황을 방치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그들만의 천국...증시 농락하는 PEF
초저금리로 자산시장이 달아오르며 가장 많은 돈을 번 곳 가운데 사모펀드(PEF)를 빼놓을 수 없다. 거액 자산가, 기관투자자의 자금을 운용하는 PEF는 비상장 기업을 인수한 후 기업공개(IPO)로 투자 차익을 챙겼다. 저금리로 증시가 활황을 보이며 자산가치가 전반적으로 오른 덕분이 컸다.
투자로 돈을 번 것은 잘못이 아니다. 문제는 이들이 수익을 내는 과정에서 나타난 시장 교란이다. 상장이 투자 회수 수단인 PEF로서는 공모가가 비쌀수록 이익이다. 상장을 주관하는 투자은행(IB)이나 증권사 역시 마찬가지다. 저금리 상황에서 부풀어 오른 기업가치가 공모가의 잣대가 됐다. 거품이 낀 공모가로 상장이 이뤄지면 결국 일반투자자의 돈으로 PEF 곳간을 채운 꼴이 된다.
PEF는 경영권 인수(buyout)뿐 아니라 재무적 투자(FI)를 통해서도 수익을 낸다. 보유 기업 상장을 원하는 대주주와 손잡고 ‘기업공개 전 투자(Pre-IPO)’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FI들이 프리IPO에서 높은 가치를 매겨주면 해당 기업에 대한 시장의 기대가 커진다. 공모가는 자연스럽게 프리IPO 가격보다 높게 형성돼 대주주는 싸게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고 FI는 차익을 키우게 된다.
PEF가 투자 회수를 위해 상장한 기업 가운데 이후 주가가 크게 오른 기업을 찾기 어렵다. 사실 PEF들은 상장 전 배당 등으로 기본적인 회수작업을 끝낸다. 일시적 투자자에 불과한 PEF가 중장기 비전을 가지고 경영을 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PEF는 챙기고 나서 남은 것들을 잘 포장해서 시장에 내다 팔면 그뿐이다. 이는 공모시장에 대한 신뢰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PEF가 만든 공모시장 거품은 금리가 오르며 급격히 가라앉았고 시장은 차가워졌다. 정작 자금이 급한 기업들의 데뷔 문턱까지 높아졌다. PEF들은 IPO가 어려워지자 ‘수건돌리기’처럼 자신들끼리 보유 기업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성과급을 노린 듯 값도 후하게 계산했다. 이들을 다시 시장에 내놓을 때는 이보다 더 높은 가격으로 받기 위해 애쓸 게 뻔하다. 설령 ‘폭탄 돌리기’로 끝나더라도 손실은 투자자 몫이다.
최근에는 상장사를 매입한 후 아예 상장을 폐지시키는 전략도 등장했다. 상장된 기업의 시장 평가는 쉽게 바꾸기 어렵다. 상장사에 대한 여러 규제도 경영하는 입장에서 부담일 수 있다. 일단 무대에서 내린 후 새롭게 치장해서 높은 값으로 다시 팔려는 전략이다. 다른 기업과의 결합(bolt-on) 전략도 활용될 수 있다. 다시 데뷔했을 때 해당 기업의 가치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살펴야 할 듯하다.
kyh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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