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리에서 현리까지 물망(勿忘)의 전투들[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하지만 38선을 넘어온 후 중공군은 약점이 부각되는 반면 유엔군은 장점이 커졌다. 중공군이 북한 산악지대에서 수적 우세를 앞세워 유인 매복하던 수법은 한계가 있었다. 아군은 이제 포위돼도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고립 방어’로 버티며 막강한 화력으로 제압했다. 아군은 중공군 개입 이후 38선 이북에서 잇따라 패배한 뒤 위축된 자신감을 되찾고 공세로 돌아섰다. 불의의 사고로 워커 장군이 사망한 뒤 후임으로 부임한 매슈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을 앞세운 반격이 주효했다.
| 1950년 |
9월 28일 |
유엔군 서울 수복 |
| 10월 1일 |
국군 38선 돌파 |
|
| 10월 19일 |
유엔군 평양 탈환(같은 날 중공군은 압록강 도강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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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26일 |
국군 초산 압록강 도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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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세 역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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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5일 |
중공군 평양 점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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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월 26일 |
중공군 38선 돌파 |
|
| 1951년 |
1월 4일 |
중공군 서울 점령 |
| 1월 10일 |
유엔군 37도선(평택~삼척) 후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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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과 후퇴 소요 기간 >
유엔군
중공군
- 38선 → 평양 : 19일
- 38선 → 압록강 : 26일
- 압록강 → 38선 : 67일
- 38선 → 서울 : 9일

● ‘서울 후퇴’ 공성전(空城戰)과 원주 전투
1951년 ‘1·4 후퇴’는 다시 수도를 뺏기는 것이었지만 워커 사망 후 부임한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공성전략이기도 했다. 중공군은 12월 26일 38선을 돌파한 뒤 주공(主攻) 방향을 서울로 두고 철원 연천 쪽에서 4개군을 앞세워 압박해왔다. 리지웨이는 서울이 포격권에 들어 많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으면서 보다 방어가 유리한 곳에서 반격을 하기 위해 서울 남쪽 60km 지점의 오산〜삼척선까지 작전상 후퇴를 했다.
처음 한강 다리를 먼저 끊어 많은 납북자 피해를 낳았던 것과 달리 서울 시민에게는 1950년 12월 하순 피난령이 내려졌다. 후에 북한도 유엔군의 반격으로 밀려 올라갈 때 서울 사수나 방어 의지를 보이지 않고 3월 5일 군대를 철수시켰다. 서울은 공격과 방어 양측 모두 점령하고 있는 것이 이점도 되지만 부담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서울을 거쳐 남진하는 동안 중동부 전선의 원주가 중공군과 북한군에 의해 한때 점령당했다. 미 10군단 2사단이 원주를 탈환하고 지킨 ‘원주 전투(1월 5~13일)’ 승리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공산군이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남도현, 283쪽). 군우리 전투에서 한 개 연대 규모가 섬멸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미 2사단으로서는 38선 남쪽에서 설욕하는 전투의 서막이었다. 2월 지평리와 5월 벙커 고지, 9월 단장의 능선전투 등에서 미 2사단은 연승을 기록했다. 무엇보다 원주전투 이후 피아간 접전은 37도선 이하로 내려가지 않았다.

● 지평리 전투, 전략 전술 리더십의 승리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1월 8일 ‘남진 잠정 중단’ 명령을 내리고 원주 전투에서 제동이 걸린 이후 주춤했던 중공군이 2월 중순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서 제39군 예하 3~5개 사단으로 공격해 왔다.
2개 군단이 만나는 이른바 전투지경선(戰鬪地境線)인 이곳에는 미 2사단의 23연대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병력에서 10배가 넘는 중과부적의 상황. 23연대는 둘레 약 12km의 원형으로 진을 치고 부대 간 빈틈을 없애 방어에 나섰다가 중공군이 점차 포위망을 좁혀오자 방어망 둘레를 6km로 축소했다. 이곳은 사단 본진과 30km가량 떨어져 즉각적인 지원도 어려웠다.




이틀 밤이 지난 뒤 원형 방어 진지 밖에 대한 미 공군의 맹폭 지원 속에 미 제5 기병 연대가 포위망을 뚫었다. 일본에서 발진한 C-119S 수송기 24대는 14일 3시간가량 보급품을 공중 투하했다. 2박 3일간의 전투에서 중공군은 5400여명이 전사한 반면 23연대는 전사 52명, 실종 42명이었다.


● ‘인해전술’ 극복한 반격의 전환점


지평리 전투는 유엔군이 다시 반격의 터닝포인트를 이루게 하는 분기점이자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주눅 들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전투였다. 중공군이 수적 우세를 앞세워 매복과 기습, 포위 전술로 북부 산악지대에서 유엔군을 몰아내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서로 확인한 전투였다. 비록 적에게 포위돼도 방어 전면을 좁혀 방어하면서 진지 밖 적에 대해 화력을 퍼부은 것이다.


● 사창리 전투, 국군의 공중증(恐中症)과 가평의 영연방 여단
지평리 전투의 타격으로 움츠렸던 중공군이 2개월여간 재정비 끝에 무려 70여만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5차 대공세를 벌였다.
국군 6사단(사단장 장도영)이 강원도 화천의 화악산과 사창리 일대에서 중공군 4개 사단에 포위된 상황은 지평리의 미 2사단 23연대와 비슷했으나 결과는 천지 차이였다.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분산되어 있는 예하 연대가 서로 연결되지 못해 틈을 파고든 중공군에게 분리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꽹과리 피리 나팔 소리에 ‘초산의 악몽’이 다시 살아났다. ‘고립 방어’를 통해 화력 지원을 받기보다 포위당하는 두려움에 무질서한 후퇴와 도주에 나섰다. 화력 지원에 나섰던 미 포병대대도 포위 타격을 당했다. 사창리 전투(4월 22〜24일) 사흘간 6사단 1만3천여명 병력 중 가평으로 철수해서 남은 병력은 6300여명에 불과했다. 6·25 전쟁 기간 국군에 줄곧 나타났던 ‘공중증(恐中症·중공군을 두려워하는 심리)’이 그대로 드러났다.

영연방 여단은 3일 동안의 가평 전투(4월 23〜25일)에서 부대원의 40% 이상이 사상당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경춘가도를 지켰다. 이를 통해 후퇴하는 국군과 유엔군의 퇴로를 확보하고 수도권 방어를 위한 시간을 벌어줬다. 가평 전투는 수적으로 크게 밀리는 상황에서 ‘버티기 승리’를 통해 중공군의 5차 대공세라는 또 하나의 고비를 넘는 데 기여했다.


● ‘고립 방어’의 성공 사례 설마리 전투
경기 파주군 적성면 설마리 감악산 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을 중공군 제63군 3개 사단이 포위했다. 지평리나 가평 전투와 마찬가지로 ‘고립 방어’ 의지만 있으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았다. 방어선을 최대한 줄이고 밤을 버틴 뒤 낮에는 막강한 화력 지원으로 방어선 외곽의 중공군에게 타격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온창일 등, 210쪽)


● 국군과 미군의 관할권 다툼으로 생긴 구멍, 오마치(오미재) 고개
1951년 5월 태백산맥 서쪽 산악지대는 6·25 전쟁이 터진 후 새로 창설된 9사단과 11사단을 중심으로 한 국군 제3군단이 맡았다. 미군 주축의 유엔군이 주로 담당한 서부전선에 비해 열세였다. 조중(朝中) 연합군사령관 펑더화이는 막강한 화력의 미군이 주력인 서부보다 이곳이 약한 곳으로 보고 돌파하기로 했다. 당시 중동부 전선의 국군은 6개 사단인 반면 중공군은 18개 사단을 투입했다.
현리 전투의 참패는 이런 수적 열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발단은 국군과 미군 간 관할권 공백과 다툼이었다. 자연 지형에 대한 고려 없이 관할지역을 구분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제군 31번 국도의 오마치고개는 미 10군단 관할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마치 고개의 위아래 보급로는 국군 3군단에 속했다. 상체와 하체는 국군이 맡고 허리는 미군에 속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주요 지형지물은 분할하지 않는다’는 전술 교리에 맞지 않았다. 더욱이 이곳은 ‘차단되면 끝이다’고 생각될 만큼 요충지였다.
3군단은 미군 관할 지역에 29연대를 배치했다. 이게 화근이 됐다. 미10군단이 왜 남의 관할 지역에 병력을 배치하느냐며 철수하라고 했다. 결국 29연대를 빼면서 1개 대대만 남겨놓았는데 이번에는 더 상위인 미 8군에서 철수를 요구했다. 4월 11일 오마치에서 대대 병력마저 철수시켰다. 문제는 국군이 병력을 모두 빼낸 뒤 미군이 즉각 배치되지 않은 것이다. 인제 홍천 횡성 정선을 이어주는 교통과 전략의 요충지를 비워둔 것이다.

● 방어, 초기 대응, 후퇴 총체적 실패
중공군 선발대 1개 중대가 17일 오전 7시30분경 오마치 고개를 장악했다. 그들은 30km가량 떨어진 곳에서 출발해 야간 12시간 동안 산악지대를 시간당 평균 2.5km씩 행군했다. 선발대 도착에 이어 곧 제60사단 전체가 밀물처럼 쏟아져 올라왔다.
오마치 고개가 적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돼 포위당할 것을 우려한 3사단의 김종오 사단장이 진지 사수를 포기하고 철수를 명령한 것이 대 실책이었다. 미군이 우세한 화력과 공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위당하는 것이 곧 전멸은 아니었다. 지평리 전투나 바로 옆 벙커고지 전투가 이를 증명했다.
그런데 3사단은 철수를 위해 현리에 집결한 뒤 적이 장악하고 있는 오마치 고개 돌파를 시도했다. 고개를 점령하고 있는 부대 규모를 오판했을 수도 있다.
고개를 장악한 중공군의 공격을 받자 부대원들은 무거운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까지 버리고 무질서하게 주위 방대산 등을 타고 도주했다. 일부 간부는 계급장도 떼고 철수했다고 한다. 퇴로가 차단됐다는 이유만으로 전투를 포기하고 사단장부터 말단 사병까지 줄행랑을 쳤다. 70km가량 남으로 내려왔을 때 3사단은 34%, 9사단은 40%가량만이 수습됐다.(남도현 324쪽)

현리전투(5월 16〜22일) 패배로 3군단은 해체되고 유재흥 군단장은 보직을 잃었다. 그는 개전 초기 가장 먼저 붕괴된 전방의 7사단장으로 7사단이 해체됐다. 이어 1·4 후퇴 후 그가 군단장이던 2군단도 대전에서 해체된 바 있다.

● 벙커고지와 용문산의 설욕
군우리 전투 참패 후 지평리 전투에서 되갚았던 미 2사단은 중공군의 6차 대공세(5월 16일~20일)에서도 선전했다. 벙커고지 전투(5월 17∼19일)에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고지를 사수해 중공군의 홍천 진격을 막았다. 지평리 전투의 주역이 23연대였다면 벙커고지 전투는 38연대였다. 국군 3군단이 현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있던 때 38연대도 홍천 북방 778고지 일대에서 포위됐다. 38연대는 적과 근접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전 병력이 참호를 깊이 파고 벙커에 엄폐한 뒤 피아가 섞인 진지 내에 포화를 퍼붓도록 하는 위험한 작전을 벌이면서까지 진지를 지켰다.
용문산 전투(5월 18~20일)도 현리, 벙커고지 전투와 같은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전투 중 하나였다. 국군이 사창리와 현리 전투에서 잇따라 패퇴해 국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에서 이를 만회한 쾌거였다. 당시 사단장은 사창리 패전 때와 같은 28세 약관의 장도영 소장으로 그의 설욕전이기도 했다. 6사단 2연대 장병들은 철모에 ‘결사(決死)’를 새기고 전투에 임했다.

중공군의 ‘지하 만리장성’ 땅굴


1952년 5월 말까지 제1선 방어진지 땅굴 공사가 기본적으로 완성됐다. 8월 말에는 동, 서해안에서도 집중적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6개 군단이 땅굴 약 2백km, 참호와 교통호 약 6백50km, 각종 화기엄폐물 1만여 개를 건설했다.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250km 길이의 모든 전선에 구축된 폭 20~30km의 방어선에 땅굴을 핵심으로 한 거점식 진지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난공불락의 ‘지하 만리장성’을 형성했다.(훙쉐즈, 390쪽).
중국이 한국 전쟁 참전 후 가장 큰 승리로 꼽는 상감령 전투도 바로 이 ‘지하 만리장성’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중공군이 총길이 250km의 전선에 구축한 갱도 길이는 287km에 달했다고 한다.

단점도 적지 않았다. 땅굴 생활을 하려다 보니 콩기름이든 등유든 기름이 많이 소모됐다. 병사들은 산소가 부족해 기관지염에 걸리고 식수가 부족해 혀가 갈라지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 참고문헌 |
| 남도현 지금, 『6·25, 끝나지 않은 전쟁』, 플래닛 미디어, 2010. 온창일 등 지음, 『6·25 전쟁 60대 전투』, 황금알, 2010. 유재흥 지음, 『격동의 세월』, 을유문화사, 1994.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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