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천천히 보면 빵 터질걸?…'극강 I'의 개념미술 [어떤울림]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미술작품에 MBTI를 대조한다면, 적어도 외향형(E)과 내향형(I)는 구분이 가능하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바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이 있는가 하면, 반쯤 숨겨서 찾아내도록 하는 작업도 있다. 개념미술에서 이같은 스타일은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최근 리움에서 전시를 종료한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이제 막 전시를 시작한 김범(60)의 작업이 그렇다. 카텔란이 ‘극강 E’였다면 김범은 ‘극강 I’다. 슥 봐선 알 수 없다. 꼼꼼히 보고 찬찬히 살펴봐야 알 수 있다. 그래서 더 빠져드는 ‘I’의 개념미술이다.
개념미술은 어렵지만 또 어렵지 않다. 미술작품을 결과물로 평가하기보다 그 작업이 나오게 된 작가의 창조적 발상에 초점을 맞춘것이 개념미술이다. 지독히 상업화 된 미술계에 반기를 드는 측면도 있고, ‘최소한’을 강조하는 미니멀리즘과도 일맥상통한다. 김범의 작업은 둘 다에 걸쳐있다. 이를테면 이런식이다.
#1. 망치가 임신을 했다. 뚝딱 뚝딱 무언갈 만들어내는 망치가 배가 불렀다. 곧 무엇이 탄생할까?(임신한 망치, 1995) #2. 뚫린 캔버스 뒤로 철망이 보인다. 철망의 영어 표현은 치킨네트(chicken net), 캔버스는 통닭 모양으로 잘라냈다. 소소한 언어유희다. (철망 통닭, 1993). #3. 한 강사가 모형배를 가르치고 있다. 지구의 지질학적, 기상학적, 천문학적 특징을 이야기 하되, 단 하나만 다르게 말한다. 지구가 육지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바다에 나가야 쓰임을 다 하는 배에게 ‘탄생부터 쓸모가 없다’고 주입한다. (바다 없다고 배운 배, 2010)
김성원 리움 부관장은 김범의 작업에 대해 “허구와 현실을 넘나드는 가교를 만들며, 툭 던지는 농담같은 작업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상식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해 질문한다”고 설명한다. 작가가 제안하는 시점의 변화는 인식의 태도 변화를 말한다.
‘바위가 되는 법’이라는 주제로 리움에서 열리는 전시엔 회화, 드로잉, 설치, 영상 등 70여점이 나왔다. 1990년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작품세계를 포괄하는 작가 최대 규모 전시이자 2010년 아트선재 이후 13년만의 국내 개인전이다. 김범은 한국 개념미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주요 작가다. ‘시적 감수성과 조형적 상상력이 절묘하게 융합된 작가’라는 평을 받는데, 아버지 김세중 조각가와 어머니 김남조 시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다.
13년만의 전시는 그간 희미했던 존재감을 다시 부각시키기 충분하다. 1990년대 대표 연작인 ‘교육된 사물들’, ‘친숙한 고통’, ‘청사진과 조감도’ 및 최근 디자인 프로젝트 등 그간 국내에서 만나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았다. 리움측은 “한국 동시대미술에 큰 영향을 준 김범의 정수”라고 설명했다.
김범의 회화는 그림이 아니라 글이 적혀있다. 빈 캔버스에 “Loo at this blue sky(이 파란 하늘을 보시오)”, “Stare at this trees(이 나무들을 쳐다보시오)”, “Look at the flowing river here(여기 흘러가는 강을 보시오)”라고 쓰여있다. 관객들은 글귀를 읽고 파란하늘과 강가의 나무라는 이미지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개개인마다 모두 다른 풍광을 떠올릴 것이다. 이것이 김범의 풍경화다. 김 부관장은 “개념적 작업이지만 관객의 참여가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 작업이다. 모두 자신의 풍경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글로 그린 작업은 회화는 물론 설치에도 이어진다. ‘하나의 가정’은 난폭한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그사람의 집과 정원을 둘러보며 그의 할머니가 준비하는 식사를 기다리는 상황을 제시한다. 지시문을 읽으면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관객은 다소 위협적이고 난처한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된다.
관점 비틀기는 또 다른 회화작업에서도 나온다. 소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관점에서 보이는 장면을 그린 ‘무제’(1995), 산의 능선처럼 보이지만 열쇠의 골을 확대해 그린 ‘현관열쇠’(2001)는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라는 통찰을 수행한다. 보이는 것과 실체간의 간극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셈이다.
김범이 제시하는 세계는 모든 것이 거꾸로다. 영양이 표범을 쫓고(볼거리), 소가 사자의 생살을 뜯어먹는다. 추상화를 그리는 작가는 붓터치 한 번 할때마다 소리를 지르고(노란 비명 그리기), 폭군을 위해서는 쥐와 박쥐로 그려진 월페이퍼를 제작했다. 모순과 해학은 흥미로운 상상에만 그치지 않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관습과 체제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절정은 ‘교육된 사물들’시리즈에서 달한다. 작은 의자에 앉은 사물들, 말 그대로 페브리즈 통이나 주전자 따위가 진지하게 칠판을 바라보며 수업을 듣고 있다. 유일하게 작가가 직접 출연하는 비디오에선 “너희는 부속품이야. 그냥 시키는대로 하면 돼. 생각이란걸 하지마”하는 폭언을 퍼붓는다. 관객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있는 사물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마냥 현실과 동떨어진 하나의 작품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묘하게 상한 기분은 거대 조직 속에서 부품처럼 활동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고민하게 한다.
짧은 부조리극들은 우리를 사유의 세계로 이끈다. ‘예술이란 무엇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작가 나름의 답인 셈이다. 전시는 12월 3일까지.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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