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이젠 기술 추격국 아닌 선도국… 지식재산처 같은 IP 전담부처 필요”[현안 인터뷰]
가나 등과 IP 교육받던 한국
45년만에 경천동지할 변화
특허출원, 일본 넘어 톱3 될 것
기술전쟁은 결국 인재 싸움
직무발명에 세제 혜택 줘야
국가·기업차원 철저관리를
기술유출땐 산업에 큰 타격
관련범죄 양형 기준 높여야
소송 늘며 전문성 제고 시급
특별전문위, 연내 대안 마련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가 발표한 ‘2022 세계 특허 출원’ 순위에서 한국은 2021년 기준 3599개의 특허를 내 일본(1770개), 스위스(1119개), 중국(1010개), 독일(791개), 미국(790개) 등을 제치고 단위 인구당 내국인 특허 출원 세계 1위를 차지했다. ‘2022 WIPO 글로벌 혁신 지수’에서도 한국은 총점 57.8점으로 세계 6위에 올랐다. 동남아시아·오세아니아 지역에서 순위가 가장 높다. 중국은 11위(55점), 일본은 13위(53.6점)였다. 지식재산권(IP) 분야에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한국은 현재 특허출원 세계 4위, IP 5개 상임이사국, 국제특허출원(PCT) 공식 언어 지정국 등의 지위를 보유하고 있다. 관련 업계에서는 빠르면 2027년, 늦어도 2030년에는 한국이 일본을 넘어 ‘IP 3대 강국’에 오를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40년 넘게 국내 IP 분야 최고 전문가로 활약해 온 백만기(69)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은 한국의 놀라운 혁신성은 세계적으로도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강조했다.
백 위원장은 “제가 1978년 특허청 심사관으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을 때 WIPO에서 실시하는 개도국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함께 교육받던 국가들이 가나,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등이었다”며 “그런데 45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함께 교육을 듣던 아프리카 등에 교육을 하는 국가가 됐다. 얼마나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변화인가”라고 말했다. 백 위원장은 한국은 ‘추격 기술’이 아닌 ‘선도 기술’을 보유한 국가로 거듭났다며 IP 활용과 보호에서도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기술 패권 경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인재 싸움”이라며 “크게 보면 공개된 영역의 IP 분쟁이 있고, 공개되지 않은 영업비밀 분쟁이 있는데 정부는 물론, 기업 입장에서도 핵심 인재들을 어떻게 잘 보호·관리하느냐가 제일 큰 숙제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과학기술 분야로 유입되는 인재가 많아지고, 또 그 사람들이 한국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직무발명보상금 과세 완화 등 다양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백 위원장을 지난 10일 서울 중구 정동빌딩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의 책장에는 특허와 관련한 국내외 최신 서적들이 가득했다. 백 위원장은 “세계적인 트렌드를 놓치지 않으려면 새로운 정보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고 했다.
―현 시점에 지재위의 핵심 역할은 무엇인가.
“IP는 혁신주도 성장을 위한 핵심요소다. 특허청, 문화체육관광부, 농림축산식품부 등 다양한 부처가 IP에 관여하고 있지만 IP 생태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 컨트롤타워 역할은 지재위가 맡고 있다. 경제구조는 점점 무형자산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국가 차원에서 이 무형자산을 어떻게 창출하고, 활용·보호할 것이냐를 고민하는 게 지재위의 과제이다.”
―지재위가 추진 중인 주요 정책이 있다면.
“IP 관련 소송이 증가하면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소송 전문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현재 IP 소송 전문성 제고 특별전문위원회를 구성해 다양한 논의를 하고 있고 연말까지 대안을 마련하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특허법원이 산업재산권 중심으로만 분쟁을 처리해 왔지만 앞으로는 영업비밀 침해, 소프트웨어 관련 분쟁 등에도 관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 한 가지는 향토 IP 문제다. 지방 경제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보성 녹차, 순창 고추장 등 각 지역의 향토 IP를 권리화하고, 이것을 수출과 연결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한다면 지방 활성화는 물론, 수출 증대에도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한국 기업과 기술에 대한 침해 분쟁이 늘고 있다.
“한국은 이제 추격 기술이 아닌 선도 기술을 보유한 국가가 됐다. 엄청난 혁신성을 바탕으로 특허 강국 위치에 서다 보니 소위 ‘특허 괴물’로 불리는 특허관리기업(NPE·특허를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거나 판매하지 않고 특허권 행사만으로 수익을 얻는 사업자)이 국내기업을 상대로 제기하는 마구잡이식 특허소송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IP 경쟁력은 어느 수준인가.
“한국의 IP 분야 성장 속도는 한마디로 ‘놀랍다’고 평가할 수 있다. 특허청 심사관으로 WIPO 훈련에 참가했을 때 함께 교육받던 국가들이 가나, 아프가니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등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몇천 달러 수준에 머무는 국가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함께 교육 듣던 아프리카 국가 등에 교육하며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살고 있다. 얼마나 놀랄 만한 변화인가. 더 값진 건 최근 WIPO 조사에서 한국의 혁신 역량이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6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중국이 11위, 일본이 13위인데 이로 인해 일본에서는 해당 보고서 결과가 굉장히 충격적이라는 자료들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 한국은 특허출원 세계 4위 국가이자 IP 5개 상임이사국 지위를 갖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항상 비교되는데 최근 일본의 특허출원이 점점 감소하는 반면, 한국은 인구가 2.5배쯤 적은 상황에서도 특허출원이 늘고 있다. 특허청에서는 빠르면 2027년, 늦어도 2030년까지는 한국이 일본을 역전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곧 한국이 ‘글로벌 IP 톱 3’로 도약한다는 뜻이다. 저도 꾸준히 IP 분야에 몸담아 왔지만 한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다.”
―IP 침해 관련 피해를 막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가.
“크게 보면 소위 특허와 같은 공개된 영역의 IP 분쟁이 있고, 공개되지 않은 노하우나 영업비밀 관련 분쟁이 있다. 정부 정책 관점에서 국가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핵심 기술이 예기치 않게 유출되면 이는 산업 경쟁력에 엄청난 타격을 준다. 사실 우리나라가 가장 우려하는 건 중국으로의 기술 유출인데 반도체 등 초격차를 보유한 분야에서 기술이 빠져나가면 급속도로 경쟁력이 떨어질 우려가 있다. 미·중 패권 경쟁으로 중국 입장에서는 반도체 기술 도입이 굉장히 어려운 구조가 됐고, 이로 인해 한국의 기술을 더 탐낼 수밖에 없다. 결국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첫 번째 현실적 대안은 기술 유출 사실이 발각돼 기소됐을 때 양형 기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그동안은 기소가 돼도 처벌이 너무 약해 유출을 사전에 막는 효과가 생각보다 약했다고 보고 관련 논의를 하고 있다. 두 번째는 기술 유출 행위를 탐지하고 기소로 이어가는 과정에서 특허청, 국가정보원, 검찰 등의 협조 체제가 중요한데 이 부분을 더 강화하기 위해 지난달 특허청 산하에 IP 범죄 수사지원센터를 개소했다. 국가적인 시스템이 갖춰지면 IP 관련 범죄에 더 강력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인력 유출 등의 문제도 중요할 것 같다.
“기술 패권 경쟁이라고 하는 건 결국 인재 싸움이다. 산업혁명 이후 패권 경쟁을 보면 가장 많은 기술 인재들을 확보한 나라들이 주도권을 갖고, 힘을 유지한 걸 알 수 있다. 기술 인재는 사람이라 여러 유혹에 흔들릴 가능성이 큰데 국가와 기업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이런 관점에서 과학기술 분야로 유입되는 인재와 현재 종사 중인 인력들이 일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다양한 기회와 인센티브를 줄 필요가 있다.”
―구체적인 지원 방안이 있다면.
“현실적인 인센티브 방안 중 하나가 직무발명보상금 과세 완화다. 현재 직무발명보상금은 근로소득으로 잡히기 때문에 보상금을 탈 경우 최대 45%의 세율이 매겨진다. 이는 30%인 로또 당첨금 세율보다 높은 수준인데 과학기술인들 입장에선 연구에 대한 사기 저하와 이탈 현상을 부추기는 악재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과학기술 분야 인재 영입과도 관련이 있는데 노력에 대한 대가가 뒤따르지 않는다고 하면 누가 지원을 하려고 하겠나. 이미 의대 선호 현상이 만연해 있는 가운데 ‘로또를 기다리기보다 발명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의대 집중화 현상이 완화되고 더 많은 인재가 과학기술 분야로 유입된다면 국가 혁신 성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한 가지는 핵심 분야 퇴직자들에 대한 처우 문제인데 최근 국내에서 좋은 해결책이 나왔다. 특허청에서 올해 처음으로 반도체 퇴직 기술자들을 특허심사관으로 뽑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30명 채용에 지원자가 200명 넘게 몰렸다. 중국에서는 국내 퇴직 기술자를 영입하기 위해 3∼5배에 달하는 연봉을 제안하기도 하는데 특허청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퇴직자들에게 ‘인생 2막’을 제시한다면 선순환이 가능하다. 올해 대성공을 거둔 특허심사관 채용 프로그램을 향후 5년 정도 더 유지한다면 부족한 국내 특허심사관을 고급인력으로도 채울 수 있다.”
―IP의 중요성이 커지는 만큼 지재위 이상의 권한을 가진 전담 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5년마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우리나라 특성상 IP 관련 몇십 년 단위 장기 계획을 세우는 건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결국 산업재산권뿐 아니라 저작권 등을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지식재산처와 같은 부처가 언젠가는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당장 출범이 어렵다면 우선은 특허청의 기능을 더욱 키우고, 정부가 키 플레이어 역할을 자처하며 우리 경제를 한 차원 높은 IP 기반 경제구조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 상공부 재직시절 미국 기업 반덤핑 소송 막아내… ‘미스터 반도체’ 별명
백 위원장이 본 ‘한국 반도체’
“쇼트트랙처럼 한순간에 승부
대만에 파운드리 뒤처졌지만
정부지원 맞물려 힘발휘할것”
백만기 국가지식재산위원회 민간위원장은 새 도전을 맞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 전망을 밝혔다. 대만 TSMC와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부문 경쟁에서 당장은 한 발 뒤처져 있지만 향후 진검승부가 시작되면 적기에 이뤄진 정부 지원과 함께 한국 기업의 저력이 발휘될 것으로 예상했다. 백 위원장은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반도체산업과장 시절 미국 반도체 기업이 국내 반도체 3사를 상대로 제기한 반(反)덤핑 소송에서 관세율을 한 자릿수로 막는 등 탁월한 업무추진력을 보여 ‘미스터 반도체’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 위원장은 “지금은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이나 패키징 기술 등에서 TSMC가 삼성전자보다 앞서 있는 게 사실”이라며 “다만 그동안 메모리반도체에 집중하던 삼성전자가 파운드리에 자금과 인력을 투자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앞으로는 해 볼 만한 싸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정부의 용인 시스템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과 삼성전자의 300조 원 투자 계획이 적기에 나온 건 큰 기회로 작용할 것”이라며 “반도체 산업은 쇼트트랙 경기와 같아서 한순간에 승부가 뒤집히는데 지금 한국은 정부와 기업이 같은 방향을 보고 있기 때문에 곧 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 위원장은 글로벌 불확실성을 높인 미·중 패권 경쟁이 반도체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오히려 한국에 득이 됐다는 해석도 내놨다. 그는 “만일 패권 경쟁이 없었다면 수많은 반도체 장비와 공정 기술 등이 중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라며 “여기에 중국의 대규모 투자까지 진행됐다면 엄청난 속도로 한·중 간 기술 격차가 줄었을 텐데 미·중 갈등이 결과적으로 한국에 시간을 벌어줬다”고 했다.
△195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전자공학 학사 △카이스트 전기 및 전자공학 석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 △특허청 전자심사담당관실 심사관 △통상산업부 산업기술정책과장 △특허청 심사4국장 △대통령직속 녹색성장위원회 민간위원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 △산업통상자원부 연구·개발(R&D) 전략기획단장 △김앤장 변리사 △한국지식재산연구원 이사장 △국가첨단전략산업위원회 위원 △국가지재위 민간위원장
이근홍 기자 lkh@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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