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한 일만 아니라 흉한 일도 감당하는 게 인생
[[휴심정] 이선경의 나를 찾아가는 주역]
삶에 굴곡이 없으면, 그것이 행복인가?
주제가 많이 무겁다. 기쁘고 즐거운 이야기가 듣기에 편한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실상 그 반대의 측면이 빙산의 밑둥처럼 버티고 있는 것이 솔직한 삶의 모습이 아닌가. 누구나 건강하기를 원하고, 앞길이 순탄하기를 기도한다. 삶에 길(吉)과 흉(凶)이 함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우리는 늘 길한 쪽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흉한 일을 만났을 때조차도 그것을 잘 극복하여 길한 쪽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그러나 만약 아파본 적도 없고, 슬퍼 본 적도 없으며, 실패와 좌절을 겪어본 일도 없이 승승장구 살아온 이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처럼 불행하고 불쌍한 경우도 없다는 것이 인생의 역설이다.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쓰고 달고 맵고 신 맛이 한데 버무려져 숙성된 것이겠기에 말이다.
<주역>은 살면서 흉한 일을 만났을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주역>의 64괘 가운데 삶의 가장 흉한 국면을 제시한 사례는 택수(澤水) 곤괘(困卦䷮)가 아닐까 한다. 곤(困)이라는 이름 자체가 ‘괴롭다’는 뜻이다. 괘의 모양이 연못(☱)이 위에 있고 물(☵)은 아래에 있어서, 물이 연못에 담겨있지 못하고 아래로 쭉 빠져 내린 모양새이다. 더 험악하게 말하자면 몸에서 피가 쭉 빠져나간 형국이니 죽음을 면치 못한다. 이보다 더 흉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 괘의 의미를 풀어놓은 <주역>의 설명이 아이러니하다.
“곤(困)은 형통하고 곧은 대인(大人)이라서 길하고 허물이 없다. 말을 해도 믿지 않으리라.”
모순과 역설로 점철된 풀이가 아닐 수 없다. 상황은 필경 죽게 되어 흉하기 짝이 없는데, 그 풀이는 길(吉)하고 허물이 없단다. 무슨 말을 해도 남들이 믿어주지 않으니 그 곤궁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길하고 허물이 없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주역>의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기쁘게 험난한 길을 가기에, 곤고하지만 그 형통함을 잃지 않으니, 오직 군자라야 그러하리라!” 세상 사람들은 그의 무고함을 알아주지 않지만, 당사자는 의연하게 그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지조를 지녔기에, 비록 몸은 죽어 흉하더라도 그가 추구하는 ‘뜻’은 이루어지는 길(吉)한 결과를 낳으리라는 해석이다. 급기야 <주역>의 작자는 ‘연못 밑으로 물이 다 빠져 내린’ 이 괘의 모양에서 사람이 배워야 할 교훈이 “치명수지(致命遂志)” 즉 “목숨을 바쳐 뜻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다시 말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뜻한다. 죽음으로써 다시 산다는 역설이며, 길과 흉의 뒤얽힘과 뒤집힘이다.
목숨 바쳐 뜻 이루는 도학의 선비정신
<주역>의 곤괘(困卦)를 읽노라면 윤동주의 시 <십자가>, 조선의 도학자들, 안중근 의사, 최초의 한국인 신부(神父) 김대건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 현충원은 고사하고 비목(碑木)조차 갖지 못한 무수한 초야의 별들 등등, 다 헤아릴 수 없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 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 <십자가>, 1941. 5. 31.)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야말로 곤괘(困卦) 대인의 맞춤 사례가 아닐까?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 피땀으로 기도하던 예수의 괴로움이 곧 그를 복된 사나이가 되게 하였다는 역설이 있다. 시를 모르는 필자의 생각일 뿐이지만, 멀리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높이 걸린 햇빛이 어두워 가는 하늘 아래 조용히 피를 흘리며 스러져 가는 그이의 모습과 뗄 수 없이 뒤얽히며, ‘기꺼이 험한 길로 걸어가는’ 곤괘 군자를 떠올리게 된다.
도학(道學)은 성리학의 다른 이름으로, 율곡 이이는 도학의 이념을 “선(善)을 밝히고 몸을 닦아, 자기 자신에게서는 덕(德)을 이루고 정치적으로는 왕도(王道)를 이루는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그 도학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이상적 지식인의 모습을 ‘선비’라 부른다. 그러니 갓 쓰고 글 읽는다고 아무나 선비가 아닌 것이다. 선비의 모습도 유형별로 나눌 수 있겠지만, 조선조 내내 도학의 으뜸으로 추앙된 이는 정암 조광조이다. 연산군 시절 무오사화가 일어나 당시 명망이 있던 학자 김굉필이 조광조의 부친이 벼슬 살던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를 왔다. 17세의 조광조는 김굉필에게 배우기 위해 지인에게 소개장을 써달라 부탁까지 하면서, 김굉필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셨다. 유배당한 이는 만나기조차 꺼리는 것이 인지상정임을 생각할 때, 소년 조광조의 행보는 이례적이다. 이랬던 조광조는 중종반정 이후 사림의 추대와 중종의 절대적 신임 속에 4년에 걸쳐 크게 뜻을 펼쳤으나, 그의 개혁정치는 반대파들의 모략에 걸려 좌절되었으며, 결국 38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말았다. 그가 남긴 절명시가 당시 그의 심경을 대변한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처럼 하였네
환한 해가 이 세상에 내려와
한 조각 붉은 속마음을 밝게 비추오리
어디 이뿐이겠는가? 이루 다 거론할 수 없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충무공 이순신, 중봉 조헌과 700의사, 안중근, 유관순 의사를 비롯, 일제에 항거하다 순국한 우뚝한 이름들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이름도 성(姓)도 없이 기꺼이 목숨을 바친 무수한 별들의 ‘살신성인’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작년 말 한국인 최초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탄생>의 상영을 계기로,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그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감동이 있었다. 그는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으로 세계지리의 개략을 펴냈고, 영국제 세계지도를 번역해 내었다. 조선 정부로서도 그러한 인재를 아깝게 여기지 않았겠는가? 그의 국내에서의 포교 활동은 1년 남짓,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 그의 나이 겨우 스물 다섯이었다. 그러나 그의 짧은 생애는 숭고하였고 거룩한 것이었다. 비록 모습은 달랐지만, 그의 생애에는 도학자의 기백과 정신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하늘을 뜻하는 건괘(乾卦)에서 다섯 번째 효는 천지와 그 덕을 합했다고 하는 대인(大人)의 자리이다. 그런데 <주역>에서는 그 대인이 “신묘한 변화와 함께하여 길흉을 그에 합치한다(與鬼神合其吉凶)”라 하였다. 길과 흉은 한 짝이니 대인에게도 흉(凶)이 있다. 흉할 때는 흉해야 하는 것, 그것이 삶의 길이며 그럼으로써 길(吉)로 나아간다는 역설을 <주역>은 말한다.
호연지기는 하루하루 쌓아가는 것
같은 잘못을 반복해 저지르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는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치명수지’의 대인의 길은 나와는 무관한 몇몇 역사적 위인들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처음부터 나는 ‘치명수지’할 사람이라 공언하고 시작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누군들 삶이 귀하지 않겠으며, 누구라서 일부러 그런 길을 가겠는가? 그런데 ‘만약 뜻하지 않게 그러한 기로에 놓인 운명에 처하는 경우,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을 하면서 산다. 그 가운데에는 내 마음공부와 관련된 자잘한 선택들도 있기 마련이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생각한다. 씩씩하고 광대한 도덕적 기운이다. 맹자는 이 호연지기가 갑자기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 의(義)의 실천이 차곡차곡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오늘 하루의 삶에서 호연지기를 돌보지 않으면, 그 기운은 쪼그라들어 나의 집안도 다스릴 수 없지만, 그것을 잘 배양하면 이 세계에 가득 찰 만큼 자라날 수 있다고 맹자는 말한다. 결국 나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다. 오늘 하루의 작은 의로운 선택, 양심에 떳떳한 선택, 나 자신을 참되고 아름답게 가꾸려는 지금의 노력이 중요하다. “마음을 잘 보존하고, 본성을 잘 기르는 일이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라는 것이 맹자의 가르침이다. ‘나침반은 흔들리기 때문에 바른 방향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듯, 오늘도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길을 찾으며 길을 가는 우리 모두를 격려해 본다.
슬픈 사랑이 삶을 아름답게 한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본래 의(義)와 인(仁)은 한 짝이다. 목숨 바쳐 뜻 이루는 의(義)의 바탕에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는 마음’,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슬픈 사랑이 있다. ‘자비’ ‘측은지심’ ‘컴패션’이 모두 그러하다. 자비(慈悲)란 글자의 뜻 자체가 ‘슬픔을 품은 사랑’이 아닌가. ‘측은지심’은 남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을 말한다. ‘컴패션’ 역시 불쌍히 여겨 고통을 함께한다는 뜻을 지녔다. 고통받는 생명의 아픔에 함께 슬퍼하다가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게도 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슬픈 사랑이 삶을 진정 아름답게 한다. 윤동주의 시 <팔복(八福)>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련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1940. 12.)
글 이선경(조선대 초빙객원교수・한국주역학회 회장)
*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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